TV의 성공 공식: 최상의 비디오 큐레이터

사용자 삽입 이미지인터넷과 TV가 결국 하나의 몸이 될 것이라는 얘기는 TV 네트워크 진영에서도 나오는 말입니다. TV는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인터넷과 IT의 강자들이 오랫동안 끊임없이 공략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분명한 성공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일까요?

TV가 발명된 후 몇십 년 동안, TV만큼 강력한 미디어는 없었습니다. TV는 아직도 최강의 미디어로, TV 스크린 뒷면에는 방송사-TV 네트워크가 마치 한 몸처럼 소비자들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TV’라고 말하면, 그건 TV 수상기이기도 하고, 동시에 TV 네트워크의 ‘방송’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새로운 미디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미디어 점유 시간은 이미 TV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래도 TV는 잘 버텨왔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TV 네트워크가 TV 스크린을 아직도 잘 장악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 말은 달리 말하자면 실은 그 자리는 빼앗길 수도 있다는 얘기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인터넷 진영의 핵심 TV 공략입니다. TV 스크린을 장악하자.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그 이름의 무게만 봐도, 이 싸움이 과거 십자군 전쟁의 성전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진짜로 십자군 전쟁의 양상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세월은 흘러가는데, 이길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지쳐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문제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컨텐트, UI, 방송사업자…

첫째는 컨텐트. 양질의 좋은 컨텐트들을 공급해 준다면, TV 스크린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는 답이기도 하고 장벽이기도 합니다. 애석하게도, 컨텐트는 그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양질의 컨텐트를 가지고 있는 쪽은 여전히 올드미디어를 주축으로 짜인 매출 극대화의 불문율 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그 잘나간다는 케이블 채널 HBO의 독자적 스트리밍 서비스 앱인 HBO Go는 케이블 가입자만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케이블 시장이 아직 크기 때문에 그쪽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움질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에게 굉장히 큰돈을 보여주는 것뿐입니다.

인터넷에도 고유의 컨텐트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유튜브를 TV에 꽂는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특히, 시청자들은 이런 면에서는 절대 너그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물론 제작 기술의 대중화와 디지털 유통의 혁명을 통해, 점점 고급 컨텐트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는 있습니다. 하지만, 무질서하고 품질이 고르지도 않으며 어마어마한 인터넷 동영상 라이브러리를 TV에 단순히 연결해 주는 것만으로는 TV 스크린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TV는 PC가 아닙니다.

둘째, 그래서 모두 UI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합니다. TV에서의 소비 환경은 PC나 모바일에서의 소비 환경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TV는 린백(Lean-back), 재핑(Zapping) 등의 용어로 대변되는 피동적 시청 환경이죠. 대부분의 뉴미디어 TV 서비스 기획자들은, 이런 린백 환경이 앞으로 린포워드(Lean-forward)의 적극적인 소비 환경으로 변경할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정보, 커머스, 소셜 등 다양한 (인터넷스러운) 양방향 서비스를 기획합니다. 사실 이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입니다. 사람들의 TV 스크린 앞에서 행태가 린백에서 린포워드로 변화할 것이라는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났습니다. 린포워드로의 행태 변화에 회의적이던 사람들이 찾은 솔루션, 세컨드 스크린입니다. 사람들이 TV를 보면서, PC나 모바일로 딴짓하더라는 관찰 결과를 놓고 ‘아하’하고 백열등을 떠올린 거죠. 하지만 세컨드 스크린도 완벽한 솔루션으로 검증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TV를 보면서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이 TV 경험에 득이 된다는 쪽과 시청을 방해한다는 쪽이 팽팽한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고 있다는 얘기인데,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금방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몰입이 필요한 프로그램은, 세컨드 스크린은커녕 애들이 옆에서 칭얼대는 것조차 참을 수 없는 그런 환경이고, 심심풀이 땅콩인 프로그램은, 내용이 하도 하찮아서 뭐라도 다른 것을 동시에 하고 있지 않으면 스스로 바보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른 짓도 TV와 연관된 것을 하는 비율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TV 스크린이든 세컨드 스크린이든, 사람들이 TV와 관련해서 뭔가를 적극적으로 하려는 니즈가 그리 큰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TV에서의 UI는 최대 D-pad 정도의 5 키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하고, UI 네비게이션의 경로는 항상 최단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물론, 온몸을 흔들거나, 리모컨을 잘 겨누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여러 가지 새로운 인터페이스 실험들이 나오고는 있습니다만, 아무튼 린백과 재핑 만큼 효과 대비 최소 에너지 소비를 하는 효율성을 쫓아갈 UI는 아직까진 없는 것 같습니다.

셋째, 아직도 방송사업자들의 TV 수성은 강력합니다. 잡스는 방송사업자들의 보조금 시장진입 전략을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셋탑을 공짜로 풀면서 플랫폼을 혁신할 기회를 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방송사업자가 TV 플랫폼을 장악하고 있고, 그것을 뚫고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OTT 박스나 팔아서는 ‘취미’ 활동 수준을 넘어서는 사업이 안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OTT 사업자들이 앞다투어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모양을 보면, 언젠가는 뭔가 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넷플릭스(Netflix)나 훌루(Hulu) 같은 컨텐트 유통 사업자들이나, 로쿠(Roku), 박시(Boxee), 구글 같은 OTT 플랫폼 사업자들이 개척해 내고 있는 시장은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TV 네트워크들은 수많은 OTT 서비스의 공격에도, 여전히 좋은 실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코드 커터(Cord-cutter)들의 대부분은 기존 TV를 다른 수단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아니고, 단지 경제적 이유로 TV를 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심지어 OTT의 선두주자인 넷플릭스(Netflix)는 자신을 스스로 방송사업자의 보조적인 서비스라고 한껏 낮추고 있습니다.


TV≠비디오 대리점, 방송=’최고의 비디오 큐레이터’

그런데 넷플릭스가 스스로 그렇게 포지셔닝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 인터넷과 TV 진영의 사업 영역을 가르는 중요한 키워드가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터넷은 여전히 비디오 대리점 사업을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비디오 대리점이 TV 플랫폼을 장악하겠다고 들이대고 있다는 것입니다. TV와 방송은 한몸이며 때로는 같은 단어이기도 합니다. 방송이 없이, TV 플랫폼을 장악할 수는 없습니다.

왜 방송이냐, 도대체 방송이 뭐냐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방송이라는 서비스를 정의하자면, “소비자가 가장 볼 만한 시간에 가장 훌륭한 영상 컨텐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방송국은 ‘최고의 비디오 큐레이터’라는 겁니다.

우리의 행동을 더듬어 봅시다. 지친 심신을 이끌고 퇴근을 하고 나서 이제야 편히 쉴 시간이 되었습니다. TV를 켭니다. 이 시간에 TV를 켜면 항상 그 웃기는 시트콤이 나옵니다. 그리고 항상 화제가 되는 드라마가 이어지고, 그다음엔 뉴스가 나오지요. 딱히 볼거리가 없으면 다른 채널로 옮깁니다. 옮기다 보면 볼 만한 것이 어딘가에는 있습니다. 나는 가장 편안한 자세가 되고, 그저 채널을 돌리는 일 말고는 신경 쓸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단순히 컨텐트 그 자체나, 린백이나 채널 재핑의 UI가 아닙니다. 바로 서비스의 전달 방법이 중요한 것이지요. 내가 보고자 하는 시간에 가장 최신의 가장 심혈을 기울인 컨텐트가 나오는 것이 바로 TV입니다. 그러니 시청자는 그저 등 붙이고 편안히 앉아만 있으면 되죠.

자, 애초의 문제, 컨텐트와 UI의 문제는 “훌륭한 VOD를 재핑 UI로 제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을 때 훌륭한 컨텐트가 거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VOD 시장이 TV 시장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린포워드가 될 것이라는 망상이나, 검색이 가장 중요해질 것이라는 얘기는 VOD 시장에만 맞는 이야기이지, TV 시장에 맞는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시청자들이 TV에서 기대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컨텐트가 아니라, 방송이 역할을 해오고 있는 바로 그 ‘최고의 비디오 큐레이터’입니다.

인터넷이 TV의 미래가 되려면, 현재 그런 최고의 상품력을 가지고 있는 TV와 경쟁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가져야 합니다. 그저 UI만 린백/재핑으로 흉내 내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최적의 타이밍에(그냥 틀면) 최신, 고품질의(정말 즐겁고 재밌는) 컨텐트를 제공하는 경험을 인터넷이 체득하지 않으면, 인터넷은 TV의 구멍을 메꾸는 부가 상품(그냥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는 시장만 대체할 뿐)에 불과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때’를 준비할 때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최고의 컨텐트와 최고의 큐레이터를 갖출 능력이 아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왜냐하면, 방송이 스스로의 미래를 ‘인터넷’화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미 N스크린의 실험은 대세가 되었지요. 퍼스널 스크린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현실적인 수준으로까지 진전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TV 플랫폼에 대한 공감대와 절박함이 맞아떨어진다면, 기존 TV 사업자들과 인터넷의 만남은 필연이 될 겁니다. 그리고 결국은 인터넷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크리에이티브 문화와 혼합되어 보다 다채로운 TV의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그러니 인터넷은 그 새로운 TV 플랫폼-’최상의 비디오 큐레이터’스러운-을 실험하고 놀면서, TV 손님들을 마중할 준비를 하고 있으면 되겠지요. 그 ‘때’는 분명히 소비자들에게도 더 재미있는 세상이 될 겁니다.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저자: Miguel Pires da Rosa)


글 : 게몽
출처 : http://digxtal.com/?p=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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