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 통신회사를 중심으로 디지털홈 또는 스마트홈이라는 최첨단 미래 사업 영역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의 단말에는 TV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누가 대놓고 디지털홈 사업을 한다는 걸 찾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현재 가장 뜨거운 주제는 소위 ‘스마트’ 류 단말기입니다. TV도 스마트TV가 이미 대세가 된 듯합니다. 옛날의 미래 TV는 홈 마켓의 중심에 있었습니다만, 현재의 스마트TV는 어떤가요? 여전히 홈 마켓의 중심에 있나요? 현시점에서 TV를 바라보는 관점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지난 글 ‘N 스크린?‘에서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현재 유행하는 N 스크린이라는 용어의 진원지가 통신회사인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피처폰 시절, 모바일 서비스를 장악하고 있던 주체는 수퍼 갑, 통신 회사였습니다. 대표적인 월드 가든(walled garden) 생태계로 모든 서비스를 통신 회사가 쥐락펴락했으니까요.
네트워크와 관련된 모든 수익 모델의 근본은 고객의 접점인 서비스 스크린과 그를 채우는 데이터의 트래픽이라고 간략화해보면, N 스크린은 통신 회사가 사업 확장을 위해 확보해야 할 스크린과 창출해야 할 트래픽을 위한 필연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조악한 표현력의 피처폰과 개방형 웹의 PC는 통신 회사가 파이프 장사를 뛰어넘을 놀이터로 한계가 분명해 보입니다. 새로운 놀이터가 필요한데, 트래픽이 잡히지도 않으면서 가장 많은 소비 시간이 일어나는 미개척 스크린이 하나 있습니다. 그 노다지가 바로 TV죠.
디지털홈은 모바일, 웹, TV를 묶어 사용자의 24시간 스크린을 장악하려는 노력이었고, 그래서 그 키워드는 ‘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유비쿼터스(ubiquitous)’였죠. 그래서 이 디지털홈 생태계는 그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고민하게 됩니다. 비디오,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는 물론, 에너지, 홈오토메이션, 보안 등의 제어, 영상통화 등 통신, 각종 정보 서비스 등. 수익 모델에 대한 고민도 다양하게 전개됩니다. 컨텐트, 광고, 망 사용료나 월정액, B2B 플랫폼, 심지어 단말 판매 모델까지.
스크린도 모바일, PC, TV를 넘어 디지털 액자, 인터넷 냉장고, 인터넷 미디어 폰, 로봇, 심지어 디지털 사이니지 영역까지 ‘유비쿼터스’의 기치에 걸맞게 수많은 제4, 제5의 스크린 실험들을 ‘강행’합니다. ‘N 스크린’이라는 용어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을 했고요.
시장은 자연스럽게 홈 마켓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 중심 스크린에 TV가 놓여 있었습니다. TV가 홈 서비스의 중심이고 모바일은 보조적 스크린, 제어 단말로서 포지셔닝되었죠. TV를 미디어 센터, 홈 게이트웨이로 생각했으며, 그 서비스의 정점은 TV 포털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언제나 사업은 시범 서비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집에 뭔가를 설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TV에 드라마, 뉴스 말고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공감하지 못했고, 추가로 돈을 왜 더 내야 하는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나름대로 몸을 키워오던 디지털홈은 거대한 화석으로 굳어갔고, 심지어 건설 사업이나 도시 설계의 인프라 사업이라는 미래의 먼 나라 얘기로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때는 바야흐로 2007년, 결정적인 사건 하나로 패러다임의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로 ‘아이폰’의 등장입니다.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모바일 시장이 바뀌게 된 것이죠. 이것은 단순한 모바일 단말기의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획기적인 사용자 경험을 바탕으로 앱스토어의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젠 모든 단말기에 ‘스마트’ 열풍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변화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완성도 있는 플랫폼의 기반 위에 모바일이 퍼스널 미디어 단말기로서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키워드가 ‘유비쿼터스’에서 ‘퍼스널’로 바뀌게 된 것이 바로 가장 큰 패러다임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 스크린은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되었죠. 홈 타겟의 상품들은 사그라졌습니다. 새로운 스크린 실험에 대한 소문은 사라졌고, 홈 제어 같은 서비스는 취미가의 호사로 전락했습니다.
서비스가 한결 단출해지고, 미디어로서의 개념으로 집중됩니다. 컨텐트가 중심이 되고, 무엇보다 비디오 서비스의 변화가 두드러졌습니다. 그러자 정말 자연스럽게, 다시, TV 스크린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OTT 박스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스마트 TV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뭐가 바뀌었죠? 제가 보기엔 별로 바뀐 게 없습니다. 전에도 ‘유비쿼터스’라는 말 자체가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개념적으로 차이는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TV 스크린을 고민하고 있으며, 여전히 답은 없습니다. 심지어는 옛날로 회귀하는 움직임마저 보입니다. 이렇게요.
SK브로드밴드도 [SK텔레콤과 함께] 내년 초 출시를 목표로 스마트 IPTV 셋톱박스 개발에 착수했다. (중략) 단순히 IPTV에 스마트 기능을 더한 수준을 넘어 향후 차세대통합커뮤니케이션(RCS), 인터넷 서비스 등과 연결해 홈게이트웨이로 육성할 계획이다. [전자신문]
…TV가 홈의 중심에 서 있는 기계이다. TV를 중심으로 한 스마트 홈을 빌드[구축]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 홈 컨트롤, 에너지 매니지먼트, 시큐리티 등… – 삼성전자 허득만 상무. 스마트TV 글로벌 서밋 2012 행사 강연 내용 중.
2007년 이전에 디지털홈에서 실패했던 전략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TV가 홈의 중심이며, 게이트웨이라는 인식이죠. 표면적으로 바뀐 것은 있습니다. 기술이 좋아졌고, 합법적 컨텐트 유통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2007년 이후에 소비자의 인식에 변화가 있었을까요? 디지털홈에 대한 소비자의 외면이 비단 기술과 컨텐트만의 문제였을까요?
제 생각에 힌트는 바로 패러다임의 변화에 있다고 봅니다. ‘스마트’ 디바이스가 대유행을 하고 있지만, 본질적 키워드는 ‘스마트’가 아니고 ‘퍼스널’입니다. 스마트 TV, 스마트홈이 아니고, ‘퍼스널 TV’, ‘퍼스널 스크린’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2007년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 변화입니다.
TV는 지금 정체성의 혼란에 빠져있는지도 모릅니다. ‘퍼스널’의 시대에 TV는 경계적 단말기라는 겁니다. 시분할이 아니라면, 퍼스널 하기 굉장히 어려운 단말기죠. 그런 TV가 다시 홈 마켓을 부활시키고 스마트홈, 디지털홈의 기수로 나선다는 것을 저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TV 역시 퍼스널 마켓을 타겟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TV 스크린은 앞으로도 여전히 킬러 서비스인 라이브 프로그램 방송의 파이프를 꽂고 있을 것 같습니다. 방송처럼 예측 가능한 검증된 품질과 동시성이 딱 공유 스크린에 맞는 컨텍스트니까요. 홈 마켓으로서의 TV는 딱 거기까지입니다. 이젠 퍼스널 마켓을 봐야 합니다. 여기선 라이브의 의미는 재해석될 것입니다. 단순히 DVR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온디멘드와 라이브가 더욱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TV가 퍼스널 스크린 확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역으로 방송 서비스가 퍼스널 스크린으로 확장되는 것도 중요한 방향이죠.
2007년 이전에 디지털홈이 TV에서 실패한 것은, 홈 마켓으로 접근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너무나 안정적인 홈 마켓에 너무나 생경한 서비스를 구겨 넣으려 했으니까요. 게다가 캐치프레이즈는 ‘유비쿼터스’였으면서, 자꾸 TV에 센터를 두려 했으니 개념적으로도 모순입니다. 아마 그때도 새로운 수요처는 홈 마켓이 아니라 퍼스널 마켓이었을 겁니다.
글 : 게몽
출처 : http://bit.ly/UmVV6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