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는 같이 타되 휩쓸리지 않는다
경우 #1.
모두에게 욕을 먹는데 나에게는 잘 해주는 상사가 있다. 남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고약한 업무스타일을 갖고 있는데 어쩐지 나와는 잘 맞는 사람이 있다.
경우 #2.
분명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내부 분위기상 빠져나올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직원들이 미팅이나 한담 자리에서 상사에 대한 불만의 표현으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을 때. 처음엔 약간만 멍청해 보이는 계획이길래 귀찮아서 동의했는데 점점 아주 멍청한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을 때.
경우 #3.
인간관계도 아니고 업무도 아닌데 내가 ‘엉망진창 우당탕’이라고 부르는 상황들이 있다. 음주 회식을 하고 2차로 맥주 한 잔 더 한 뒤 노래방 가자고 하는 분위기인데 사람들은 중간에 하나둘 빠져나가고 나를 포함한 서너 사람만 남게 된 상황.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어쩐 일인지 다들 만취가 되어 목소리가 높아지고 몇몇은 눈이 반달이 되어 흉흉한 눈빛을 하는 상황.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대처는 미리 고정된 틀을 상정해서 대비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서 그것에 맞게 해결해나가는 편이 효율적일 때가 많다. 하지만 주어진 상황들의 핵심 속성이 무엇인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변수가 무엇인지를 판단할 기준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속절없이 불필요한 일에 이리저리 휘말리기 마련이다.
위에 예로 든 세 가지의 경우는 직접 겪어보기도 하였고 다른 많은 사람도, 특히 직장생활을 하는 남자라면 종종 마주쳐야 하는 상황일 것이다. 각기 다른 상황인 것 같지만, 상황의 핵심 속성은 같다. ‘한 배를 탔다’, ‘같이 파도를 탔다’로 요약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첫 번째.
모두에게 욕을 먹는데 나에게는 잘 해주는 상사가 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곤란하게 느끼는 경우이다. 상사와 친분을 유지하자니 동료들이 신경 쓰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업무 외의 관계를 차단하며 건조하게 대하려니 상사의 미움을 받을 것만 같다.
직장생활 초년기에 지방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십오 년도 넘은 이야기다. 내가 있던 팀은 과장급이 지휘하는 일종의 테스크포스였다. 과장은 전권을 휘두르는 불도저식 업무스타일에 고함을 지르면서 욕설도 수시로 하는 사람이었다. 팀원들의 태도는 표리부동했다. 함께 회의할 때는 표정도 말도 없이 있다가, 대면보고처럼 일대일로 과장을 대할 때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모든 대화의 소재는 과장에 대한 욕이었다. 하지만 회식 때 술이 한 순배 돌면 서로 형, 동생 찾아가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분위기는 화기애애 모드였다. 그렇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다시 그 자리.
나는 도저히 그런 분위기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딱 잘라서 자신의 견해를 정하고 앞에서 대놓고 못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면 타인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기준을 세우고 나서 업무와 사적인 대화의 모든 측면에서 열린 자세로 과장을 대했다.
사무실의 선배들은 ‘조심해라. 저 사람하고 엮이면 너만 피곤하다’든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네가 누구랑 더 오래 근무할지 잘 생각해봐라’ 등의 말을 내게 했다.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나날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처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하기 쉽지 않다. 명확한 기준이라는 것이 없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미리 이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의 접근법, 분석의 틀을 생각해놓는 것이 좋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분석의 틀을 한번 보자. 모두에게 욕을 먹는데 나에게만 잘 하는 상사를 A라고 하자. (안의 v 표시는 당시 나의 상황이었다) 어떤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체크리스트는 아니다. 실체가 있는 행동의 방식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두루뭉술하게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다가 닥치면 대응하는 습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v 표시를 해놓고 한발 떨어져서 살펴보니 과장은 능력적으로 우수하며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회사에서 소위 ‘엘리트 코스’를 통해 키우는 인재 중 하나였다. 단점도 확실했다. 그는 철저하게 결과 위주로 업무를 처리했고 팀을 과도하게 압박했다. 성과를 상급부서 입맛에 맞게 부풀리거나 과장하고 보고서의 단어선택이나 문장을 바꿔서 그럴싸하게 보이게 하기도 했다. 그 정도였다. 그뿐이었다.
과장은 확실히 부서를 리드하고 있었고 다른 부서에 비해 성과가 높았다. 팀원들도 그 덕을 보고 있었다. 사내 상도 골고루 받았고 내외의 협조도 잘 되었으며 매번 성과금도 두둑이 챙겼다.
과장에 대한 팀원들은 불만은 실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학력이나 집안 같은 배경에 따라 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느꼈다. 외국 유학파나 유명 대학 출신 후배는 집으로 초대하거나 같이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부하와는 커피 한 잔 마신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 상황판단이 되자 내 행동방침은 명확해졌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해놓은 일과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자’였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업무를 했다. 다만 전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장과 더 많은 의사소통 시간을 가지고 업무 외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또 그만큼 팀원들과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많은 신경을 썼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게 참 많았다.
나는 과장을 통해 고위급 간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업계의 전반적 분위기나 회사 내부 소식을 알게 되었다. 또 나는 원래 태생적으로 관계를 관리한다든가, 남을 살뜰히 챙기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팀원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고 칭찬을 하고 나를 중심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등의 노력을 하면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과장과 친하게 지냈지만, 팀원들과의 관계가 나빠지진 않았다. 업무도 잘 풀렸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발전이 있었다.
두 번째.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내부 분위기상 빠져나올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전에 알고 지내던 한 협력업체의 이 대표는 음향기기 수입업을 하고 있었다. 수입업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그의 벌이는 어지간한 월급쟁이보다는 많았지만 번듯한 회사의 CEO에는 못 미쳤다. 사업에 욕심 안 부리고 직접 발로 뛰면서 마진율 높이는 착실한 방식으로 업계의 부침 속에서 제법 오래 살아남았다.
그런데 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고 나이가 들면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 어울리는 사람들도 사업가나 대표들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골프를 배우고 위스키를 마시고 외제 차를 함께 타고 CEO들이 모인 자리에 몇 번 가면 헛바람이 들기도 한다.
이 대표가 그랬다. 그는 새롭게 사귄 사람들의 사무실에 몇 번 가보더니 어느 날 대출을 받아 매장을 확장했다.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혹해서 시장 분석이나 장기전략도 없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전에는 작은 사무실에 여직원 한 명에 아르바이트 학생 한 명을 두고 물건은 임대 창고에 쌓아두었기에 운영비가 적게 들었다. 그러나 번듯한 대표사무실과 행정실, 안내데스크를 마련하고 전시 및 판매를 겸한 매장을 마련하니 겉보기엔 번드르르했지만 매달 사업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적자가 발생했다.
안 그래도 기울어가는 사세에 쐐기를 밖은 것은 엉뚱하게도 잡지사 창간이었다. 어울려 다니던 일행 중 한 명은 소위 ‘김박사’라고 불리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는데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이 대표에게 ‘음향 전문잡지를 발간해라. 거기에 광고를 실어 수익을 내고 잡지구독 층이 넓어졌을 때 거기에 자사 수입 음향기기 광고를 내면 일거양득’라는 식의, 그야말로 장님 문고리 잡는 수준의 제안을 했다. 이 대표는 이것을 덜컥 물어버렸다.
처음엔 제법 그럴싸했다. 영국 유명 음향 전문잡지의 라이센스를 가져와서 번역 형태로 잡지를 내기로하고 편집장과 기자를 한 명씩 시간제로 고용했다. 작은 사무실에 세를 내어 간판도 달고 자신은 ‘잡지 발행인’이라는 타이틀로 명함도 몇 통 주문했다. 그리고 망했다. 잡지사도 수입업도.
세 번째.
엉망진창 우당탕탕이 되어 가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이 어느 순간 엉망진창 우당탕탕이 되어 하루아침에 신세가 바뀐 사람을 몇몇 안다. 회식 후 2차에서 다들 만취가 되었다가 눈을 떠보니 경찰서였다는 사람.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운전대를 잡았고 어느 순간 경찰관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람. 그렇다. 술이 원수다.
사소한 마찰로 시작된 부서 여직원과의 신경전이 거듭되어 쌓이고 쌓이다가 모두가 참여한 전사적 회의에서 여직원이 울음을 터뜨려서 구두로 주의를 받은 선배도 있었다. 회사 내 여직원들에게는 왕따 비슷한 처지가 되었고 남자직원들이 모인 곳에서는 종종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불교 관계 서적 같지만 ‘바로 그 한마음이 든 순간, 마음의 소리를 곧장 따라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 이건 아니잖아’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 즉각 그 상황에서 올바르다고 생각해온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만약 부모님이 옆에 있다면 어떻게 하라고 하실까 생각해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또 상대가 내 가족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를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술이건 뭐건 그런 판단의 기준에 따라 적절히 행동한다면 엉망진창 우당탕탕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글/남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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