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내가 듣고 만난 이상한 캐릭터들
첫 번째 에피소드 :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라
최근에 들은 가장 ‘골 때리는’ 일화. 직장에 갓 입사한 여자 후배가 해준 이야기다. 나도 나름 건너건너 아는 스타트업 2세대 남자 CEO가 이 여자 후배를 만나 처음 몇 번은 친절도 베풀고 밥도 사고 이런저런 좋은 얘기를 해주더니 계속 ‘너는 성공할 수 있다. 훌륭한 여자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말해주더란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는 계속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라’고 하더니 언젠가부터는 또 ‘내가 그 거인이다. 나를 이용해라. 우리 자주 만나자’고 하다가 최근엔 ‘너 같은 여자와 연애 한 번 하는 게 소원이었다’고 말하더란다. 말 다했지, 뭐.
이거 나만 직감적으로 무슨 소린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건가? ‘너는 성공할 수 있어. 훌륭한 여자야’에서부터 ‘거인’ 어쩌구저쩌구에 이어 ‘연애 한 번’까지 전부 번들번들한 야욕의 냄새가 풀풀 풍기지 않는가?
의외로 사회에 갓 진출한 여자들은 남자의 속 뻔한 멘트와 매너에 속 편하게도 넘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또 반대로 보면 남자들은 그런 속 뻔하고 상투적인 매너가 여자에게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가? 그럴까? 실은 대부분, 둘 다 착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짓는 표정과 만들어내는 말이 상대에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만큼 상대도 바보는 아니라는 것을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속고 속아주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굳이 ‘거인의 어깨’ 단계까지 오기도 전에 그 여자후배는 이 남자가 뭔가 흑심이 있다고 생각해서 조심하고 있었다. 다만 한 다리 건너 자신이 하는 업무와 관련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뭐라 딱 끊지는 못해 그냥 멀리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남자는 한두 번 만나주니 자신의 작업이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더 노골적이 되었지만 여자 후배 쪽에서 조금씩 밀어내니까 오기가 생겼나보다. 문자, 카톡 폭탄을 보내다가 안 되니까 결국에는 그 흔하디흔한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야, 니가 그렇게 잘났냐? 계속 잘 나갈 것 같지? 처음에 밥 사주고 술 사줄 때는 좋다고 따라다니더니 이딴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보자’ 라고 했다던가. 아, 오그라들어…
처음 보는 혹은 한 두 번 본 업계의 남자가 밥을 먹자, 술을 마시자, 성공하게 도와주겠다고 하면 ‘응. 다 내가 잘 나서 그런가보다. 나는 인기폭발이구나’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일단 왜 상대가 나에게 그런 제의를 하는지 객관적으로 생각해볼 일이다. 그리고 무언가 비극적인 결말이 예상되는 뻔한 코스라면 남자 선배나 동료를 대동해서 같이 만나든지 처음부터 정확하게 선을 긋는 판단력이 좀 필요할 듯하다. 살면 얼마나 살 것이고, 직장생활을 평생할 것도 아닌데 ‘얼마나 잘 되나 두고 보자’는 말을 굳이 들을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남자들도 밥 먹자고 하면 나오고 함께 술을 마실 때 던진 농담에 숨넘어갈 듯 웃는 상대 여성의 심리를 정상적으로 판단해야한다. (물론 그런 판단력이 있는 남자는 얼마 없겠지만) ‘오, 이 여자가 나에게 호감이 있나?’라고 생각하는 멍청한 남자들이 의외로 많다. 대학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기본적으로 나이 많은 남자는, 여자에게는 ‘아저씨’다. 친분관계가 없는 여자가 업무 관계 등의 미팅으로 만난 자리에서 순순히 저녁 약속에 응하고 술자리에 동석하면 그건 비는 시간에 저녁 값 아끼는 셈 치고 만나는 것이란다. ‘술은 좋아하는데 딱히 만날 사람이 없어서 오케이’라고 생각하면 적당할 것이다.
어쨌든 그 여자 후배는 결국 몇 번 더 그 거인을 만나서 밥을 먹고 술을 마셨고 어깨에 탔는지 안 탔는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여기저기서 그 여자 후배와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는 남자들의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뭐, 이쯤 되면 그녀가 거인 아닌가.
두 번째 에피소드 : 첫인상을 적어 놓는다
용인술이 뛰어난 선배가 있다. 밀고 당기고 줬다 빼앗고 울리고 웃기는데 아주 선수다. 사람을 달달하게 들었다가 뒤통수를 쳐서 바닥에 내려놓고 껄껄껄 웃는 그야말로 시정잡배 리더십이랄만한 것을 능수능란하게 쓴다. 모두가 칭찬하지만, 또 모두가 뒤돌아서 욕을 하는 뭐랄까, 아주 이상적인 중간관리자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한번은 이 선배의 용인술의 비법을 물어보았다. 그런 것을 동경하거나 뭔가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는데 한 번쯤은 철학이랄까 아니면 방향성이랄까 이런 것을 직접 입으로 들어보고 싶었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나는 첫인상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을 적어놓고 (여기서 한숨을 쉬었다) 수시로 다시 들춰보지.” 무슨 말을 더 할 것 같았는데 그러지 않기에 물어보았다. “첫인상이라는 게 말 그대로 ‘인상’이잖아요. 한번 보고 ‘아, 이거야’했는데 아니면 어떻게 해요?”
선배의 대답은 기괴한 걸작이었다.
“첫인상을 적어놓지. 그리고 지켜보는 거야. 음… 지켜보는 거야. 첫인상이 다 맞지는 않아. 안 맞지, 물론. 당연하잖아? 난 점쟁이가 아니라구. 점 같은 걸 물론 믿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저 놈은 진국이다 싶었는데 나약한 엉터리일 수도 있고, 저거는 등허리에 칼 꽂겠다 싶었는데 바닥에 길듯이 충성을 하는 놈도 그중에는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가 않아. 알아?” 물론 알 턱이 없다. 선배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첫인상을 적어놓았단 말이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낸들 알 길이 있나.
선배는 말을 이었다.
“내가 첫인상을 ‘내 새끼’라고 적어놓았다 이거야. 그럼 그놈은 뭘 해도 내 새끼야. 그냥 밀고 나가는 거야. 일을 잘 하든 못 하든, 나를 씹던 말던. 그냥 품고 가는 거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단 말이야. 맡겨놓은 일을 망치면 다 시마이해주고 그렇게 하는 거지.” 그 다음 이야기를 할 때 나는 속으로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솜씨 있게 ‘네, 네. 그렇죠’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첫인상을 ‘배신할 놈, 뒷통수 때릴 놈’이라고 적어놓았으면 일을 아무리 잘 해내고, 아무리 스타일이 좋아도 절대 내 영역 안으로 들여놓아서는 안 돼. 왜? 첫인상이 무너지니까. 내가 정해놓은 첫인상은 그대로 가야 되는 거야. 일을 잘 한다? 그럼 트집을 잡아. 완벽한 건 없거든. 반드시 구멍이 있단 말이야. 그 구멍을 파. 일을 못 하는 놈으로 만들어. 인간성이 좋아? 그럼 실수할 때까지 기다려. 실수를 한단 말이야, 언젠가는. 그걸 물고 늘어지는거야. 그렇게 할 때 화를 내거나 대들면 딱 좋지.”
“요는 말이야. 내가 공들여 첫인상을 파악하고 적어놓고 관리하고 피드백을 해서 인간관계를 체계적으로 정립하려는 노력, 그 일관성이 중요한 거란 말이야. 좋은 놈, 나쁜 놈 딱 구분해서 좋은 놈은 좋은 놈으로 만들고 나쁜 놈은 계속 나쁜 놈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편해. 한번 정한 첫인상을 수정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대응책을 새로 고민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수월하잖아. 다 나한테 빌빌댄단 말이야. 내가 주도권을 쥐는 거지. ‘저 사람한테 한 번 잘못 보이면 그냥 거기서 끝이다’라는 소문, 정평이 나는 거, 그게 중요한 거야. 나는 그런 캐릭터, 그런 영역을 독점하고 있다고. 그게 중요한 거야.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모두를 다 품고 갈 수는 없어. 누가 내 편이고 누가 아닌지를 그때그때 신경 쓰면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한번 딱 봐서 ‘아, 저 놈은 이쪽 편, 이 놈은 저쪽 편’ 정해놓고 그냥 밀고 나가는 거야.”
아, 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무식한 용인술인가. 한편 또 생각해보면 얼마나 순수하고 일목요연한 철학인가. 이런 것을 만약 용인술 혹은 철학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말이다. 모르겠다. 저런 기괴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럼 내 첫인상에는 뭐라고 써있어요?’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선배를 언제 처음 봤는지 그 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다가 만약 첫인상이 ‘나쁜 놈’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 남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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