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코스이야기 1] 매니저들과 저녁 같이 먹기

내가 보스턴인근 월쌤(Waltham)에 위치한 라이코스의 CEO로 발령을 받은 것은 2009년 2월이었다. 2008년말 리먼브라더스가 붕괴하면서 전세계에 금융위기가 도래해 세상이 얼어붙은 때였다. 미국의 실업율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계속 상승하던 때였다.

미국 유학 경험은 있지만 미국직장에서 일을 해본 경험은 없었던 나로서는 이런 암울한 분위기에서 어떻게 미국인들 80여명으로 구성된 회사를 끌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더구나 10여명을 구조조정으로 내보내는 와중이어서 직원들은 혹시 자기도 잘릴 수 있다는 공포심에 휩싸여 있는 상황이었다. 사무실을 걸어 다니다 보니 PC화면에 이력서를 띄우고 다듬고 있는 직원들도 보일 정도였다. 후일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회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회사의 문을 닫으러 온 것이라고 믿는 직원들도 많았다.

라이코스 본사가 있던 Waltham의 빌딩. 회사가 잘 나가던 90년대말에는 저 건물 전체를 다 썼는데 내가 갔던 2009년에는 규모를 많이 줄여서 3층만 쓰고 있었다.
라이코스 본사가 있던 Waltham의 빌딩. 회사가 잘 나가던 90년대말에는 저 건물 전체를 다 썼는데 내가 갔던 2009년에는 규모를 많이 줄여서 3층만 쓰고 있었다.

직원들과 친밀해지기 : 차 한잔하면서 담소.

어떻게 하면 나를 저승사자로 대할 직원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 내가 택한 방법은 1:1 면담이었다. 한 사람당 30분씩 최대한 시간을 내서 차 한잔을 놓고 만나서 이야기했다. 일단 아무 얘기나 하다 보면 친밀감이 형성될 것 아닌가. 직원들도 새로운 CEO가 뭔가 들으려고 한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2002년 MBA졸업후 7년동안 영어를 쓸 일이 별로 없어서 도대체 영어가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하다보니 영어도 늘었다. 하루에 몇명씩이라도 부지런히 이렇게 대화를 했더니 한달이 지나니 거의 대부분의 직원들과 안면을 틀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인도계 직원은 “이 회사에 10년을 다녔는데 CEO와 직접 1대1로 이야기해본 것은 처음”이라며 지나치게 흥분해 당황하기도 했었다.

물론 뒤숭숭한 상황에서 본사에서 온 CEO에게 처음부터 친밀하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사 있었다고 해도 돌이켜보면 다 살아남기 위해서 내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이름과 얼굴을 익혀 놓으니 서로 휠씬 대하기가 편해졌다.

직원들과 친밀해지기 : 같이 점심 먹기

그리고 점심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한두 명씩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사람은 밥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쉽게 마음을 열게 된다는 것이 내 경험이었다. (혼자 밥을 먹지 않는 것은 기자시절부터 베인 버릇이다.) 미국사람이라고 그게 다르겠냐 싶었다. 그리고 밥을 같이 먹고 내가 돈을 내면 고마워하고 기뻐했다. (물론 이것은 회사비용으로 했다.) 사장하고 같이 밥을 먹는다고 꼭 사장이 자신 몫까지 계산해 줄 것이라고 생각 않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웬만하면 윗사람이 밥값을 내는 한국식 문화를 적용한 결과 많은 직원들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했다.

당시 가끔 점심을 같이 했던 오퍼레이션 매니저 조 프라노비치.
당시 가끔 점심을 같이 했던 오퍼레이션 매니저 조 프라노비치.

하지만 내 점심시간은 하루에 한번이기 때문에 단시간에 모든 직원들과 밥을 먹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단은 매니저급부터 같이 식사하기 시작했다. (1년쯤 지나니까 거의 전 직원과 점심을 한번씩은 따로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보스턴에 단신 부임이었다. 가족들은 몇 달 뒤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회사 바로 앞에 있는 Extended Stay America라는 모텔에 장기 투숙중이었다. 보스턴에는 아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회사에 나가는 것 외에는 할 일도 없었고 쓸쓸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직원들과 이야기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부족한 내 영어 실력을 보완하는 영어 회화 연습 시간이라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한국식 친밀해지기 : 저녁 약속

그런데 문제는 저녁시간이었다. 5시에서 6시사이에 직원들은 거의 다 집에 가버리는데 나는 밥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었다. 모텔에 돌아가서 한국에서 사온 3분카레나 컵라면을 먹기도 했는데 그것도 조금 지나니 질렸다. 저녁 6시이후에는 사무실에 별로 사람이 없고 모텔방은 빛이 잘 안드는 골방같은 곳이어서 있기가 싫었다. 그래서 주요 매니저들에게 “저녁을 같이 먹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미국의 패밀리 타임

그런데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더니 몇몇 매니저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단박에 OK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와이프에게 물어보고 알려주겠다”는 답이 많았다. 아니 그걸 왜 와이프에게 물어보지? 이 사람들 알고 보니 공처가들이구나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한 2주일 정도 거의 매일 저녁시간에 매니저들을 데리고 저녁을 먹었다. 맥주 한두 잔을 곁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건 점심과 달리 별로 호응도가 높지 않은 것 같았다. 이래저래 집에 일이 있다고 변명을 하면서 빼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가까워진 매니저에게 저녁을 하면서 진심을 물어봤다. 그 친구는 이혼소송이 진행 중이라 아내와 별거 중이었다.

그 친구왈 “여기서는 웬만하면 모두 점심약속으로 하지 저녁약속을 하는 경우는 없다. 비즈니스 때문에 저녁을 하는 경우는 거래처 사람이 출장을 와서 계약을 하거나 하는 중요한 경우에 한하지 웬만해서는 저녁약속을 잘 잡지 않는다. 특히 결혼한 기혼자의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한국 모회사에 낙하산으로 온 저승사자 같은 사장이 “저녁 먹자”하니까 내키지 않으면서도 따라 나온 것이었다. 사장이 저녁 먹자고 하면 있는 약속도 취소하고 따라오는 한국식 문화에 익숙해진 나의 실수였다.

1년쯤 지나서 휠씬 친밀해진 HR(인사) 담당 매니저 존과 그때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존은 “미국에서는 웬만하면 저녁은 가족과의 시간(패밀리타임)으로 간주하며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가족이 있는 사람에게 저녁시간을 내달라고 회사에서 요구 못한다.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면 배우자에게 이혼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때 내가 그걸 모르고 실수한 것이라고 따끔하게 한마디했다.

자기가 좋아서 회사에 남아있는 것이라면 괜찮지만 회사에서 직원에게 패밀리 타임을 건드리면서까지 회식(?) 등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계기였다. 예전에 미국에서 공부도 하고 그렇게 많이 출장을 다녔지만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항상 상대방에게 시간을 청할 때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시간을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미국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었다. 너무 바쁘게 사는 한국인은 여기에 너무 무감각해진 듯 싶다.

글 : 에스티마
원글 : http://goo.gl/jh1l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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