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코스 이야기 4] 나이와 호칭을 따지지 않는 문화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게 가장 편했던 것은 ‘나이와 호칭을 따지지 않는 문화’였다. 물론 미국이라고 나이와 호칭이 전혀 상관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비교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따진다는 얘기다.

반면 한국에 돌아와서 짜증이 나는 것은 끊임없이 나이를 따지는 문화다.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누가 연장자인지 따진다. 감추려고 해도 감추기가 어렵다. 참석명단을 돌리면서 무신경하게 요구하는 주민등록번호 때문에 서로의 나이를 쉽게 알게 된다. 관에서 하는 행사에 가면 필수요건처럼 이름옆에 나이를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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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라이코스에 가서 직원들 면담을 하면서 가끔 상대방의 나이가 궁금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알수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는 것은 실례라는 것쯤은 알아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HR매니저 존과 찍은 사진.
HR매니저 존과 찍은 사진.

그래서 “직원들의 인적사항을 볼 수 있는 회사 인트라넷이 있느냐”고 인사담당(HR)매니저인 존에게 물어봤다. 펄쩍 뛴다. 직원들의 개인적인 인적사항 정보는 사장이라고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입사나 퇴사 등의 행정적인 절차 때문에 HR정보를 확인해야 경우에 한해 HR담당자인 자신만 보는 것이지 그외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줄 수 없단다. 이력서나 지원서에 나이를 적는 것이 당연시 되고 또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항상 타인에게 자신의 나이를 드러내보일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문화와 달라서 좀 놀랐다.

그래도 직원 면담을 할때 내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미리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존에게 이야기하니 이메일로 사전에 취합된 이력서를 보내준다. 하지만 사진, 성별, 나이 등이 없이 학력과 경력이 건조하게 나열된 이력서를 봐서는 정확히 나이를 알기 어려웠다. 그나마 학교졸업연도 등으로 대강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졸업연도도 안 쓴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직원들의 나이가 궁금할 일은 없었다. 나이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보다 휠씬 나이가 많아보이는 일부 엔지니어들이 있어서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하지만 존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어차피 중요한 것이 아니니 나이는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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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따지지 않는 것보다 내가 더 편하게 여긴 것은 이름을 그대로 부르며 존댓말이 없는 영어 언어습관이었다.

한국에서는 나이나 출신학교, 출신지역에 따라 손윗사람의 경우 형님, 선배로 부르거나 아랫사람의 경우는 “준현”, “준현씨”하는 식으로 그냥 이름을 부른다. 연배가 높은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을 “정희”, “재현”하는 식으로 이름만 부르는 것은 큰 실례일 수 있다.

또 이름이 아니고 성에 대표, 부사장, 전무, 국장, 과장, 대리 등 직함을 꼭 붙여서 불러줘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어색해서 상대방을 부를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누구나 상대방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망설인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한국의 호칭문화와 달리 미국에서는 직함없이 상대방 이름을 그대로 부르면 된다. 영어의 특성상 존댓말도 없다. 아무나 그냥 이름만 기억하고 부르면 된다. 심지어 가족간에도 그렇게 한다.

서로 나이에 상관없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문화가 너무 편했다.
서로 나이에 상관없이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문화가 너무 편했다.

직원들과 복도에서 마주치면 “헤이, 정욱 하우아유”(Hey Jungwook, how are you?)라고 말을 건넨다. 한국의 대기업에서 사장에게 말단직원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한국에 있을 때보다 직원들과 휠씬 평등한 관계에서 말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팀에서 일을 할 때도 서로 나이와 직위를 (한국과 문화와 비교해서) 덜 의식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 편이다. 미국에서도 동부보다는 서부가, 기존 전통산업계보다는 IT업계의 신생기업일수록 더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일반적인 미국인의 경우 이름이 참 기억하기 쉽다. 크리스, 존, 조, 다이애나, 케빈, 에드, 티파니, 마크… 이들이 내가 밀접하게 일하던 라이코스 핵심매니저들의 이름이다. 몇년이 지나도 잊어버릴 수가 없을 정도로 이름이 쉽다. 크리스처럼 너무 흔한 이름은 사내에서 동명이인이 여럿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성은 보통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안된다.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쉽게, 더 자주 불러주기 때문이다. 이름을 불러주다보면 쉽게 친근감을 가지게 된다.

복잡한 호칭없이 퍼스트 네임만을 불러주고 쉬운 이름을 쓰는 문화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생활속에서 매일 마주치는 주위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줄 수 있다는 것이다. 라이코스의 동료들은 자주 다니는 샌드위치가게의 점원이름이나 헬스클럽의 매니저이름이 제니퍼라든지 톰이라는지 하는 것을 모두 기억하고 그들을 이름으로 불러줬다. 심지어 매일 아침에 사무실을 청소해주는 여성도 “제인”이라고 이름으로 불러줬다. 더 인간적으로 상대방을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다니는 식당의 종업원이름이나 방을 매일 청소해주는 분의 이름도 “아줌마, 아가씨, 아저씨”, 아니면 “저기요”로 호칭할 수 밖에 없는 한국의 문화와 비교해 나는 이런 미국의 호칭문화를 참 부럽게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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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미국인이라고 나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재무팀장인 티파니에게 한 재무팀원의 나이를 아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 그랬더니 펄쩍 뛴다. 자기가 어떻게 그걸 아느냐는 것이다. 알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단다.

나중에 다른 미국인 임원과 이야기했더니 티파니의 이런 반응은 과장이란다. 절대로 나이를 안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일하다보면 편하게 나이를 공개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공식적으로는 대충은 서로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대충이다.)

솔직히 자신보다 드러나게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매니저가 되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관찰해보면 나이가 많은 사람이 팀에서 적응을 못하는 것은 나이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젊은 세대와 일하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경우에 문제가 됐다. 나이가 많더라도 유연하게 젊은 마인드로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은 나이가 어린 동료나 매니저와 일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쨌든 직장에서 서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나보다 나이어린 사람이 상관이 되더라도 개의치 않고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스트레스도 적은 편이다. 후배가 자기보다 위로 승진하거나, 나이는 들어가는데 일정 직급이상 승진하지 못하면 자의반타의반 조직을 떠나야 하는 한국문화와는 확실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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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코스의 HR디렉터 다이애나

인사담당인 존의 후임으로 들어와서 1년반동안 나와 같이 일했던 HR디렉터 다이애나는 처음 면접때 만났을때 나이가 나보다 휠씬 많아보였다. 어림짐작으로 나보다 10살은 위일 것 같았다. 하지만 존의 강력한 추천도 있었고 일을 잘 할 것 같아서 뽑았다. 그리고 이후 한번도 나이를 물어본 일이 없었다. 본인도 절대 나이를 밝히지 않았다. 같이 일하면서 나이가 부담스럽기는 커녕 오히려 다이애나의 다양한 경험과 연륜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조직을 원만히 운영해가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몇년뒤 둘다 라이코스를 그만두고 나온 뒤에 같이 점심식사를 하면서 나이 이야기가 나왔다. 그녀는 빙그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자기 나이가 얼마나 될 것 같냐고 맞춰보라고 했다. 그녀의 실제 나이는 내 예상보다 거의 십년은 위인 60세였다. 같이 일하면서 그녀의 나이를 몰랐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았으면 쓸데없는 편견에 사로잡혀 “다이애나는 나이가 많아서 이런 일은 못할거야”라고 지레 짐작하지 않았을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글 : 에스티마
원글 : http://goo.gl/WHf28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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