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한국의 벤처 환경은 ‘사막에 나무심기’
미국은 실리콘 밸리 열풍 부는데 우린 너무 열악
자금·인력·시장 애로 해소 위해 벤처사들 의기투합
창립 총회 열고 코스닥 설립·주식 옵션제 등 추진
메디슨 이야기에 이어 이제 벤처기업의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한다. 1995년 벤처 기업 최초로 메디슨이 코스피 시장에 상장을 하자, 벤처 후배들이 몰려 와서 벤처 문제로 열띤 토론이 벌인 적이 있다. “문제가 뭐지.” “자금과 인력과 시장입니다.” “그건 사업의 모든 것이 아닌가” 한마디로 당시 벤처 기업은 총체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자금과 시장 등 제반 문제들을 개별 기업의 노력으로 극복할 가능성은 대단히 낮았으므로, 결국 협회를 만들어 체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결론이 도출됐다.
95년 벤처 기업 협회 설립 이전에도 한국에 벤처는 존재했다. KTAC 등 다수의 창업투자회사, KTB(당시 KTDC)라는 전경련과 과기부가 설립한 투자 전문사 등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범천 카이스트 교수가 창업한 컴퓨터업체 큐닉스를 필두로 미래산업, 비트컴퓨터, 양지원 공구, CAS, 한글과 컴퓨터, 메디슨 등이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벤처 생태계는 여전히 척박했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을 위한 장외주식거래시장이라 할 수 있는 지금의 코스닥이 없던 당시에는 투자원금 회수 방안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KTB를 제외한 창투사들은 투자하는 시늉만 하는 형국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투자가들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단지 수익을 추구하는 회사다. 이를 토대로 말하면 창투사들이 수익을 올리게 해줄 생태계 형성이 벤처 투자 정책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이런 환경이 전혀 조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척박한 벤처 생태계를 두고 한정화 한양대 교수는 ‘사막에 나무심기’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95년 10월 26일 벤처 기업 협회 발기인 대회를 당시 국내 벤처의 메카로 불리던 테헤란로 인근에 위치한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로터스 가든이라는 중국식당에서 개최했다. 벤처 기업 협회 발기인 대회를 통해 필자가 대표를 맡고, 퓨처 시스템의 김광태 사장이 총무를 맡게 됐다. 설립 준비 과정은 카이스트 벤처인 모임인 과기회 임원들이 많은 수고를 해 주었다. 협회 이름을 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지금은 사라진 암브로시아라는 카페에서 협회 이름을 정하기 위한 난상 토론이 벌어졌다. 모험기업, 도전기업, 지식기업 등 많은 이름들이 회원 50% 이상의 반대로 인해 그 자리에서 폐기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찬진 한컴 사장이 한마디 하였다. “그냥 벤처기업협회로 합시다. 자격은 스스로 인정합시다.” 영문은 KOVA(Korea Venture Association)라는 이름으로 통과됐다. 이후 12월 2일 창립총회를 통해 벤처기업 협회는 ‘벤처 비전 2005’를 발표하고 벤처 시대 개막을 선언했다. 당시 산업자원부 백만기 과장(현 법무법인 김앤장 대표 변리사)이 불과 보름 후인 12월 18일 협회의 사단법인 인가를 해 준 것만 봐도 벤처산업에 대한 기대 등 당시 사회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만하다.
‘벤처 비전 2005’는 10년 후 한국 산업을 벤처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500개 미만의 벤처 기업을 2005년까지 4만 3,000개로 확산하고 한국 중소산업의 삼분의 일을 담당하는 신성장 동력이 된다는 목표도 제시됐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4만 3,000개는 그냥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필자가 모든 상황들을 고려했다기보다는 주먹구구식으로 엑셀프로그램을 이용해 만든 것이었다. ‘벤처 비전 2005’에 대한 세부 정책으로는 자금 문제 해결을 위한 ‘코스닥 설립’과 ‘기술보증제도 도입’, 인력 유치를 위한 ‘실험실 창업’과 ‘주식 옵션제’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중 대부분이 현실 정책으로 채택됐다.
벤처 협회의 창립 임원으로는 이범천 큐닉스 대표를 고문으로 영입하고, 이장우 경북대 교수를 자문역으로 선임해 학계 지원을 받기로 했다. 변대규 휴맥스(당시 건인전자)사장, 안영경 핸디소프트 사장, 장흥순 터보테크 사장, 조현정 비트컴퓨터 사장, 계명제 한광 사장, 성기철 양재시스템 사장, 박한오 바이오니아 사장, 김광태 퓨처 시스템 사장 등도 임원으로 참여했다. 또 출범 당시부터 경북, 부산 지부 등을 결성해 전국 조직화도 추구하고자 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당시 한국 경제의 앞날에 대한 전망은 희미했다. 선진국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은 실질적 경쟁력을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 집단들마저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아 뚜렷한 희망을 찾기 어려운 때였다. 대기업들은 기술력을 앞세운 선진국에 밀리고 중소제조업은 저임금으로 치고 올라오는 개발도상국들에 밀려나는 판국이었다. 이 시점에서 21세기에는 벤처기업이 우리 경제를 이끌고 갈 새로운 세력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혁신적 연구개발력을 바탕으로 한 기술집약적 중소기업이 대안이라는 주장이었다.
당시 미국은 실리콘 밸리를 중심으로 벤처 열풍이 불고 있었다. 자고 나면 새로운 창업이 일어나고 벤처캐피탈과 나스닥 등 벤처 생태계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미국의 새로운 성장과 고용 창출의 원동력은 바로 벤처기업들이었다. 세계는 산업사회를 거쳐 지식사회에 들어서고 있다는 앨빈 토플러의 말을 실리콘 밸리는 실증적 증명을 하고 있었다. 많은 기업가들과 학자들의 생각이 한국에도 지식 사회에 대응할 지식 집약적 중소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식이 확산되는 시점에 벤처 깃발을 들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한국의 벤처 산업 중흥을 위한 협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었다.
글 : 이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