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TV에서나 혹은 친구에게서 훈련소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특히, 숨겨둔 초코파이를 몰래 먹으려고 화장실에서 급하게 초코파이 포장을 벗겨서, 초코파이를 변기에 버리고 포장을 먹으려고 했다는 경험담은 들을 때마다 재미있지만 한편으로 무척 서글픕니다. 훈련병들의 초코파이 경험담과 비교했을 때보다 서글픔은 덜하지만, 라면봉지를 뜯어서 라면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봉지를 끓는 물에 넣거나 다리미를 귀에 대고 전화로 다림질할 뻔해서 황당했던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경험들을 모두 황당한 한 순간의 일이라고 잊어버리고 넘어가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넘어가버리면 우리는 사용자에게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자, 이런 황당한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글을 쓰면서 저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루에 있는 아내의 핸드폰이 울리네요(정말로 그랬습니다) . 그 순간, 저는어떤 내용을 어떻게 재미있게 쓸까 하는 생각에서 빠져 나와, 마루에서 울리는 아내의 핸드폰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아내가 계속해서 전화를 받지 않아, 전 더욱 전화벨 소리에 신경을 빼앗깁니다. 급한 전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서, 핸드폰을 받고 아내가 지금 전화를 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와서, MS 워드에서 깜박이는 커서를 보면서 어디까지 썼는지 고민합니다. 저는 문장을 써내려 가죠.
잠시 후면 아내 핸드폰을 받았다는 것을 잊은 채 글을 쓸 것입니다. 제프 래스킨 (Jeff Raskin)은 ‘주의소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주의소재(locus of attention)는 사람이 깨어 있고 의식할 때, 의도적이거나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디어, 물리적인 세계의 사물을 가리킵니다.[래스킨03]
저는MS워드2003을 사용해서 여러분이 읽는 이 문장을 입력합니다. 즉, 저는 글을 쓰려고 프로그램을 여러 개 띄워 두었지만, 현재 깜박이는 커서에 초점(focus)을 맞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 삼매경에 빠졌을 때 아내의 전화가 울렸고 벨 소리는 순식간에 제 주의를 빼앗아 갔습니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아내 전화의 벨 소리가 주의소재에 해당합니다.
초점은 자신이 어디에 집중할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주의 소재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습니다.[래스킨03] 예를 들어, 갑자기 울리는 초인종 소리, 길을 갈 때 날 부르는 목소리. 이런 자극들은 갑자기 생겨나서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게 하는 데 이런 것들을 주의소재라고 부릅니다.
제가 사용하는 컴퓨터의 냉각팬 돌아가는 소리는 무척이나 큽니다. 전원 스위치를 넣으면 특유의 소음이 발생하기 때문에, 제 주의 소재는 컴퓨터 냉각팬이 되고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시끄럽군. 조만간 컴퓨터 바꿔야겠다.” 하지만 잠시 후에 윈도 로그인 화면이 뜨고, 패스워드를 입력한 다음 워드 프로그램을 띄워서 글을 쓰다 보면, 냉각팬 소음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습니다.물론 냉각팬 소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온통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글을 쓸까에 집중하기 때문에, 냉각팬 소음은 더 이상 제 주의 소재 대상이 아닙니다. 즉,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가 이야기하는 몰입(flow) 상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신이 가끔 주시는 영감을 놓칠까 두렵기에, 몰입 상태에서 배고픔도 잊고 화장실 가는 것도 잊은 채 글을 씁니다.
적어도 제가 사는 아파트 옆에 외계인이 나타났다고 난리가 나지 않는 이상 몰입 상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어깨와 무릎에서 통증이 올라오자 산책의 필요성을 인식합니다. 산책을 나가려고 컴퓨터를 끄자, 냉각팬 소음이 사라지고 제 방에는 정적이 찾아옵니다. 신기하게도 소음이 있을 때 신경을 쓰지 않다가 소음이 사라진 후에 제 주의 소재는 다시 냉각팬 소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의 소재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즉, ‘소음이 존재했다는 기억’ (심리학자들은 지각적 기억이라고 부릅니다.[래스킨03])도 주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는 속담처럼 습관은 무섭습니다. 한번 형성된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습관이 없다면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기 매우 어려울 겁니다. 전 처음에 농구를 배울 때 드리블이 되지 않아서 무척 고생했습니다. 농구공을 튀기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걸어가거나 뛰어야 한다는 행동이 제겐 완전히 서커스 같았습니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농구공을 튀기는 것에 습관이 들고 익숙해지자 농구공을 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 앞을 보고 농구공을 튀기는 것에 익숙해지자 이번에는 거북이보다 느리게 걷는 것에 도전했죠. 얼마간 고생을 하다, 야호! 결국 전 앞을 보고 뛰면서 농구공을 튀기는 서커스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드리블을 마스터하는 것처럼, 반복과 연습으로 형성된 습관은 사람에게 매우 유용합니다. 농구의 기본적인 기술(슛, 드리블, 패스 등)을 완전히 몸에 익혀서 습관으로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농구를 즐길 수 있습니다. 농구 기술의 동작을 신경 쓰지 않고, 공격할 때 어떻게 수비를 교란할지, 수비를 할 때 어떻게 하면 공을 뺏을지, 즉 전술을 처리할 뇌의 용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잘못된 세 살 버릇은 해롭지만, 잘 들인 습관은 인간에게 매우 가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면 버릇이 들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부터 회사에서 사용하는 노트북에서 단축키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글을 쓰거나 프로그램을 짤 때, 키보드의 ‘Ctrl+C’ , ‘Ctrl+V’ 를 쓸수 없다는 것은 무척이나 증나더군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살아야 하기에) , 메뉴를 사용해서 복사하기와 붙여넣기 기능을 썼지만, 단축키 고장이 났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채Ctrl+C, Ctrl+V를 누르기라도 하면 화면에는 저를 조롱하는 듯한 ‘c’ , ‘v’ 문자가 밝게 빛났습니다.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면서 몸에 배는 대표적인 습관은 윈도 파일 삭제 명령입니다.[래스킨03] 윈도를 사용하면서 어떤 분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삭제하시겠습니까?” 하는 이 물음에, 대부분 반사적으로 ‘Y’키를 누르거나 ‘예’ 를 클릭합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이 메시지를 넣은 개발자의 의도가 무색해지죠. 개발자는 좋은 의도로, 즉 중요한 파일을 삭제해서 사용자가 곤란을 겪는 것을 막는 데 있었지만, 사용자는 습관적으로 ‘예’ 를 누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사용자들이 파일을 지우려고 수행하는 일련의 동작, 즉 파일을 선택하고, 삭제 기능을 실행하며, 확인 메시지가 떴을 때 ‘예’ 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습관이 발휘될 때, 어느 정도의 자극으로는 주의소재가 개입할 가능성이 무척 낮습니다. “삭제하시겠습니까?” 하는 메시지는 윈도를 처음 사용하는 사람에게 상당한 주의소재가 됩니다. 윈도의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에, ‘삭제’ 라는 부정적인 단어는 사용자의 주의를 끌기 충분합니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윈도를 사용한 사람은 삭제라는 행위가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삭제 확인’ 메시지는 더 이상 ‘주의소재’ 가 되지 못합니다.
초코파이를 변기에 버린 훈련병, 라면을 휴지통에 버린 식도락가, 전화로 다림질을 하려던 주부,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는 각 행위들이 강력한 습관으로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초코파이를 버리려고 하거나 라면을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하거나 전화기를 들고 있다는 게 주의소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웹 브라우저 주소창에 ‘ㅈㅈㅈ’ 입력하는 실수를 합니다. 물론 이젠 만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지만, 일생을 놓고 봤을 때 ‘ㅈㅈㅈ’ 을 입력함으로써 낭비하는 시간이 무척 많을 듯 싶습니다. 비슷한 상황을 패스워드를 입력할 때도 경험합니다. 항상 대문자로 입력하게 하는 ‘Caps lock’ 이 켜진 것도 모른 채 패스워드를 입력하면, 시스템은 틀린 패스워드를 입력했다고 핀잔을 줍니다. 물론 주소창에 ‘ㅈㅈㅈ’ 을 입력하는 문제야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크게 곤란하지 않지만, 패스워드는 모두 별표로 표시되기 때문에 제대로 입력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이걸 모르고 인터넷 뱅킹에 세 번 연속으로 대문자 패스워드를 입력하는 날이면 은행에 다녀오는 곤란을 겪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은 인터페이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모드(mode) 때문에 발생합니다. 사용자의 제스처(제스처는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자동적으로 끝나는 연속적인 인간 동작을 말합니다)에 따라서 인터페이스가 두 조건을 만족시킬 때, 인터페이스는 모드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 인터페이스의 현재 상태가 사용자의 주의 소재가 아니며
(2) 인터페이스에 동일한 제스처를 취했을 때 시스템의 현재 상태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발생합니다.[래스킨03]
주소창에 ‘www’ 를 입력하거나 비밀번호를 입력할 때 우리의 주의소재는 URL과 비밀번호입니다. 즉, 주소와 비밀번호 입력은 모드가 되는 (1)번 조건을 만족시킵니다. 키보드를 누르는 제스처 즉, ‘w/ㅈ’ 키를 누르는 것은 ‘한/영’ 키의 상태에 따라서 그리고 ‘대문자/소문자’ 를 누르는 것은 ‘Caps lock’ 의 상태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에, (2)번 조건도 만족시킵니다. 따라서 ‘한/영’ 키와 ‘Caps lock’ 은 모드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터페이스가 모드적인 것이 우리가 실수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다림질을 하거나 농구를 즐기거나 윈도우에서 파일을 삭제하거나 인간이 즐겁게 생활 하려면 앞서 설명했듯이 다양한 습관을 몸에 익혀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습관화된 행동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이런 행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면 강력한 ‘주의소재’ 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하지만, ‘한/영’ 키의 상태라든지 ‘Caps lock’ 의 상태, 즉 인터페이스의 모드가 주의 소재로는 그다지 강력하지 않은 상태에서 습관대로 행동할 때 모드적인 인터페이스에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에, ‘ㅈㅈㅈ’ 을 입력하거나 ‘대문자 비밀번호’ 를 입력합니다.
여러분이 만든 인터페이스는 어떤가요?
사용자에게 좋은 습관을 형성해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비모드적 인터페이스인가요?
아니면 몇 분에 한 번씩 실수를 유발시켜 소중한 시간을 빼앗아가는 모드적 인터페이스인가요?
이 연재는 이미 출판된 겸손한 개발자가 만든 거만한 소프트웨어의 글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참고문헌
[래스킨03] 『인간 중심 인터페이스』 , 2003, 안그라픽스, 제프 래스킨
글 : 신승환
출처 : http://www.talk-with-hani.com/archives/1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