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화의 대한민국 벤처스토리 (1)] 실험실 창업, 10년전엔 “상아탑에 장사꾼” 비난 뭇매

[벤처에세이]에 이어 KAIST 이민화 교수님의 글과 스타트업 탐방이 [이민화의 대한민국 벤처스토리]로 연재됩니다. 1985년 메디슨을 창업하고 1995년 초대 벤처기업협회장을 역임한 이민화 교수님은 2009년 초대 기업호민관을 맡아 중소기업에 대한 불합리한 규제 해소를 주도하기도 했는데요. 대한민국 벤처창업의 경험을 들려주실 이민화 교수님은 스타트업 탐방에서 성공한 창업 선배들의 추천을 받아 이제 갓 싹을 피우기 시작한 청년기업가들의 도전기도 소개할 예정입니다. 벤처역사의 산증인, 이민화 교수님이 들려주시는 벤처스토리에 많은 관심 부탁 드려요!

1995년 벤처기업협회가 설립된 데 이어 1996년 코스닥시장, 1997년 벤처기업특별법이 만들어 졌다. 코스닥은 자금 공급의 물꼬를 트고, 특별법은 인력, 자금 등 창업초기 벤처의 기초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벤처 창업이 폭증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필자의 순진한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창업을 이끌 기술인력은 대학과 연구소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들에게 창업이란 남의 동네 이야기였던 것이다. 시작도 끝도 연구였지, 사업화는 관심 밖이었다. 대학과 연구소 기술을 사업화 할 수 있는 대안이 부족했던 것이다. 기술이란 것이 사업화가 되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3% 정도만 살아남는 현상을 이미 세계적으로도 ‘죽음의 계곡’이라 정의하고 있지 않는가. 다른 나라의 예를 살펴보았으나 성공적인 기술 사업화 정책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과연 대안은 없을까? 필자의 메디슨 창업 경험을 찬찬히 되새겨 보았다. 필자 역시 창업을 결심하기 전에는 대충대충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기술이전은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창업을 결심한 순간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업화가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고 제대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었다. 연구개발자가 낳은 자식을 그 개발자가 직접 키운다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만 된다면 기술 사업화 과정의 죽음의 계곡을 넘어 설 확률도 높아지지 않겠는가. 연구실 안에서 사업화를 쉽게 할 수 있다면 기술창업이 활성화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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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창업로드쇼 장면


코스닥시장도 만들어졌고, 벤처기업특별법도 제정됐다. 1997년쯤 필자는 창업이 불같이 일어날 줄 알았다. 하지만 연구개발자들에게 창업은 남의 동네 얘기였다. 그래서 나온 게 실험실 창업운동이었다.

창업을 저해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나열해 보았다. 사무실 구하기, 실험설비 갖추기, 사람 구하기, 자금 구하기, 직장 그만두기 등등 이었다. 그런데 실험실에서 창업을 하면 이런 문제들이 모두 풀리는 것이다. 당시 전국의 연구실은 대략 1만개 정도였다. 이들 연구실에서 2년에 1개의 창업만 이루어져도 21세기 벤처 대국은 가능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프로젝트 이름을 ‘실험실 창업운동(Lab Venture)’라 명명하였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극복을 위한 대안으로 규제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규제 50% 철폐를 추진하고 있었다. 마침 필자가 소속 위원이었다. 필자는 실험실에서 교수나 연구원, 학생들이 바로 창업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당시 중소기업청의 송종호 과장(현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과 협력하여 10개가 넘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였다. 이를 통해 교수와 연구원은 사장 겸임이 가능해졌다. 벤처기업특별법에 이어 한국의 세계적인 발명품인 실험실 창업제도가 탄생한 것이다. 1년에 5천개의 벤처 창업과 5만 개의 일자리가 만들어 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다. 실험실 창업이 학생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교육하는 역할도 할 것이라 기대했다. 필자는 전국 수십 개 대학과 연구소를 순회하며 실험실 창업운동을 설파하고 다녔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신성한 상아탑에 웬 장사꾼”이냐는 원성이 교수사회 등으로부터 쇄도하는 것이었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교수, 학자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던 셈이다. 서울대가 위치한 관악세무서도 “도대체 학교 안에서 창업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핀잔을 주면서 사업자 등록을 계속 반려했다. 불과 10여년 전의 일이다.

실험실 창업에 이어 창업보육센터 설립도 추진됐다. 실험실 창업에서 태어난 벤처 기업들이 성장하면 실험실은 비좁기 때문이다. 더 넓은 벌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다만 이들이 둥지를 틀 장소는 연구실과 가까워야 했다. 그래서 중기청의 지원 아래 대학 연구소에 인큐베이터로서의 보육센터가 운영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전국 대부분 대학 연구소가 이를 운영하고 있다. 3백여 개의 대학 창업보육센터에서 5천개의 기업들이 산업계로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실험실 창업운동은 코스닥 시장과 벤처기업특별법이 제공하는 질적 기반 위에 양적 확대를 위한 시도였다. 아직도 시행착오 과정에 있으나, 창업 활성화를 통한 국가 도약에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다시 자리잡기 바란다.


글 : 이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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