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참 인상적인 프로젝트를 했었다. 그 프로젝트에서는 구현 자체보다 프로젝트 범위를 두고 프로젝트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고객과 씨름을 했다. 프로젝트를 준 고객부서의 팀장은 최초 프로젝트 범위보다 일을 늘려서 하기를 원하는 스타일이었다. 팀장의 스타일이 이렇다 보니까, 밑에서 일하는 고객 팀원들도 팀장과 비슷했다.
1~2주가 멀다하고 고객 팀원들은 기능 추가를 요구했고 나와 동료들은 기능 추가를 제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런 논란이 한편으로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즉 범위를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동안 명확하지 않았던 다른 기능들에 대한 스펙이 정리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부정적인 면은 범위를 두고 소모적인 논쟁이 많아져서 정작 개발할 시간이 줄었기 때문에, 야근이 잦았다.
고객 팀원과 범위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던 어느날, 사건(?)이 터졌다. 역시 그날도 고객 팀원과 기능에 대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별도 프로젝트 룸이 없었고 고객 팀원들이 있는 사무실에서 프로젝트를 했기 때문에, 토론장은 거의 사무실이 되었다. 한참 토론을 하고 있을 때, 고객 팀장이 지나가다 토론 현장을 목격했다. 팀장이 지나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고객 팀원들에게 물었다. 고객 팀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프로젝트에 OOO 기능을 개발하기로 했는데, 그 기능은 개발 범위가 아니라고 해서, 그건 관련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객 팀원의 답을 들은, 고객 팀장이 얼굴이 굳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장 제안서 들고 회의실로 들어 와.”
고객 팀장의 갑작스러운 모드 전환에 고객 팀원이나 프로젝트 팀원 모두 당황했다. 특히 당황한 것은 고객 팀원들이었다. 고객 팀장은 고객 팀원들에게 지원 사격을 해주려고 회의실에서 제안서를 보자고 했는데, 고객 팀원들이 당황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고객 팀원이나 프로젝트 팀원이나 해당 기능은 제안서에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회의실에 들어가서 제안서를 띄워놓고 팀장이 지원사격을 하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고객 팀원들에게 역풍이 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프로젝트 팀원들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우리들은 회의실에 들어가서 제안서를 띄워놓고 회의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날 우리들은 회의실에 들어가서 회의를 했을까? 아니다. 고객 팀원이 대충 얼버무려서 상황을 모면했기에, 우리는 회의실에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프로젝트의 특징 가운데 자주 언급되는 것으로, 불확실성이 있다. 오죽하면 이런 불확실성을 설명하려고 불확실성의 원추라는 멋진 개념이 나왔겠냐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프로젝트 초반에 프로젝트를 시동 걸기 위해 작성한 제안서에는 엄청난 불확실성이 숨어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확실해져 가는 프로젝트 중후반에, 제안서를 들고 와서 왜 제안서대로 프로젝트가 수행되지 않냐고 따진다면, 프로젝트를 하지 말자는 소리다.
제안서상에 있는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그나마 프로젝트의 범위를 정리해서 시작하려고, 계약단계상 작업 범위서(SOW, Statement of Work)를 작성한다. 물론 SOW대로 100퍼센트 프로젝트가 흘러가냐고 묻는다면, 이 질문에 대해서도 답은 ‘노’이다. 하지만 프로젝트 이해당사자들이 계약 단계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SOW에는 제안서보다 더 명확하게 프로젝트의 범위가 정의된다. 공히 고객이든 프로젝트 팀이든 프로젝트 범위를 따지고 물을려면 제안서를 들고 오라고 하면 안 된다. 즉 SOW를 두고 이야기하는 게 이치상 맞는 셈이다.
요즘에도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프로젝트의 범위를 두고 팀원이나 고객가 아웅다웅할 때가 있다. 이건 뭐, 프로젝트의 속성상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 접할 때마다, 난 오래 전에 “제안서 들고 회의실로 들어 와!”라고 외치던 고객 팀장이 생각난다.
이 글은, 제가 쓴 도와주세요! 팀장이 됐어요에서 다루지 못한 프로젝트의 경험법칙(물론 제 경험을 기준으로 한 법칙입니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프로젝트 관리자로서, 이제 막 시작하셨는데 방향을 잡지 못하신다면 도와주세요! 팀장이 됐어요를 통해서 도움을 얻어 보세요! 🙂
글 : 신승환
출처 : http://www.talk-with-hani.com/archives/1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