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15일 한컴은 마이크로소프트(MS)사로의 매각을 전격 발표하게 된다. IMF위기에서 대한민국이 외자 유치에 총력전을 벌이고 있던 와중에 당시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부터 2000만달러라는 거액의 투자를 받기로 한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더 이상의 아래한글 개발은 중지한다는 불공정거래 조건이었다. 400만의 아래한글 사용자 입장에서는 MS사의 워드프로세서를 구입하고 사용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처기업협회가 이 비용을 추산한 바 한컴사의 매각이 1조원이 넘는 국부손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MS사는 아래한글 때문에 일본에서 20만원이 넘는 워드를 한국에서는 거의 무료에 공급하고 있었다. 아래한글이 없어질 경우 신규 구입비용과 재교육 비용을 합하면 1조원은 쉽게 넘어설 거라는 계산이 나왔던 것. 이에 따라 그해 6월 18일 벤처기업협회는 아래한글 살리기 운동에 돌입하게 된다.
6월 22일 한글학회 등 15개 단체와 더불어 아래한글 지키기 운동본부를 벤처기업협회에 설치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였다. 그러자 MS사로부터 2000만달러 외화 유치 실적을 자랑스러워하던 배순훈 정보통신부 장관이 호출을 했다. “편협한 국수주의를 극복해야 세계화가 된다는 것이 IMF의 교훈이 아닌가. 당장 아래한글 지키기 운동을 그만두게.” 엄명이었다. “장관님! 제가 경영하는 메디슨도 외국인 지분이 높고 매출의 70%가 수출입니다. 세계화에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한컴 인수 후 아래한글 개발 중지는 명백한 불공정거래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늘같은 주무 장관에게 겁 없이 항명을 한 것이다. 이어 국정원에서 통보가 왔다. 허가없는 모금 운동은 불법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전경련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프트웨어 벤처의 미래가 이 한판의 승부에 달려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앞으로 전진했다.
7월1일 ‘1조원의 가치, 한국 소프트 벤처의 기반‘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찬진 한컴 설립자와 합의 조건인 ’100억원 투자 국민주 운동‘에 돌입하게 된다. 많은 언론들이 힘을 보태주어 아래한글 살리기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우리는 성공을 자신하였다. 모금을 조건으로 이찬진 사장은 CTO로 역할을 변경했고 신임사장을 공모한다는 합의서도 발표했다. 7월 27일 30여 명의 지원자가운데 당시 지오이넷 사장이던 전하진 사장을 신임사장을 선정했다.
1998년 7월 벤처기업협회와 한글학회 등이 주도해 만든 ‘한글 지키기 운동본부’는 한컴 신임사장으로 전하진 지오이넷 사장을 선임했다. 이찬진 전 사장은 CTO(최고기술경영자)로 역할이 변경됐다. 사진은 당시 신임사장 발표 모습.
당시 투자자금 모금과정에서의 비화를 이제는 공개하고자 한다. 8월1일 모금 운동의 뚜껑을 열어보고 우리 모두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적어도 100억원은 있어야 MS사의 2000만달러 투자를 대신해 한컴 지키기를 할 수 있는데, 민간 모금액은 뜨거운 분위기에 비하여 실망스럽게도 7억원에 불과했다. 여기에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와 조현정 비트컴퓨터 대표가 각각 5억원과 3억원씩 내놓은 게 더해져 총 15억원이 전부였다.
실망스러웠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당시 한컴의 주가는 액면가인 5000원에 못 미치는 4000원 수준이라 정상적으로 신규 주식에 투자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결과를 그대로 발표하면 자금회수를 유예했던 금융기관들이 달려들어 한컴은 MS에 넘어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무리수를 던지게 됐다. 새벽에 메디슨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사들을 설득해서 50억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 이것이 바로 메디슨이 유일하게 비의료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게 된 이유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컴 지키기에 성공하게 됐고, 한컴은 8.15 판을 내놓아 1만원에 정품의 1년 사용권을 제공하게 된다. 요즘은 일반화된 ‘빌려 쓰는 소프트웨어(SaaS)’의 시초였던 것이다. 시장의 80%를 장악하며 400만 명 사용자가 있는 글이 연간 1만원의 사용료만 받아도 400억원이 아닌가. 1998년 상반기 30억원에 불과했던 한컴의 매출은 1999년 상반기에는 179억원으로 6배 급증하였다. 코스닥에서의 시장가치도 40억원에서 2000억으로 증가하였다. 액면가에도 못 미치는 주식에 투자했던 무식한(?) 투자가들은 20배 이상의 생각지도 못했던 수익을 올리게 된다. 1년이 지난 1999년 9월 뉴욕타임스는 “한국인들이 국가의 기술자산으로 여기는 한컴의 자본이 50배 증가했다. MS에 맞서 이렇게 싸우는 것은 전 세계를 통틀어 처음”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아래한글 살리기 운동의 가장 소중한 성과는 불법복제 단속과 정부 및 공공기관의 정품 구매 정책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 소프트산업의 활로는 정품사용에 있다는 벤처협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력한 단속과 정품구매를 지시했다. 이때부터 한컴, 안철수연구소 등 소프트 기업들의 매출이 급증하고 코스닥 열풍이 힘을 얻게 된다. 글 살리기 운동은 벤처의 금모으기 운동이었던 것이다.
글 : 이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