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화의 대한민국 벤처스토리 (4)] 인터넷 코리아 운동

1998년 7월 벤처기업협회는 IMF(국제통화기금)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인터넷코리아’ 프로젝트를 정책당국에 제안했다. 인터넷코리아 사업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전세계적 ‘인터넷 경제’를 활용해 대한민국의 국가경쟁력 향상시키고, 대졸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등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길이었다.

당시 취업난 해소를 위해 추진되던 황소개구리 잡기 등 단순 일자리 사업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프로젝트였다. 과거 대공황 때 댐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 사회간접자본시설 구축 패러다임을 지식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는 구상이었다.

인터넷코리아 사업의 지향점은 인터넷을 촉매로 한 새로운 네트워크경제, 연결의 경제로 한국을 선도 국가로 부상하게 하는 것. 온라인 상품정보 교류를 기반으로 한 ‘인터넷 시장경제’ 창출이 핵심 개념이었다.

그 첫 단계 사업이 ’10만 웹마스터 양성운동’이었다. 30만 대졸 실업자들 중 10만 명을 웹마스터로 양성해 100만명 개인사업자와 10만개 중소기업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유지 보수하는 일을 맡기는 사업이었다. 나아가 한국 전체에 초고속 인터넷을 깔고 인터넷 기반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려 했다. 모든 기업을 사이버 시장으로 연결한 뒤 사이버 시장에서 이들 정보를 가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드는 회사를 만들고, 이를 뒷받침할 통신망을 정비하고, 웹TV와 디지털위성도 이들의 인프라로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정책적 제안에 입각해 정보통신부는 ‘사이버코리아’라는 사업으로 인터넷 경제의 기반인 PC와 인터넷 보급을 주도했다. 하나로통신은 한국의 아파트 문화를 기반으로 한 파격적 요금제를 선보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전 세계에 유례없는 PC방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네트워크 장비 회사들인 한아시스템, 다산네트워크 등이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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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PC방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게임 개발에서 한국이 세계를 주도하게 됐다. KAIST 출신의 문제아(?)들이 장난처럼(?) 설립한 김정주의 넥슨, 나성균의 네오위즈와 같은 네트워크 게임회사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지금 이 두 회사의 가치는 10조원이 넘는다). 한컴 출신인 김택진 대표의 엔씨소프트가 세계 최초의 3차원 네트워크 게임인 리니지를 내놓았고, 김범수 대표의 한게임도 부상했다.

인터넷 경제의 핵심인 포털들도 화려하게 등장했다. 미국의 야후와 라이코스가 한국에 진출하는 것에 대응해 토종 포털인 이해진의 네이버, 이재웅의 다음 등이 선보이게 된다. 이들 포털은 미디어인 동시에 광고매체이고 장터였고 정보공유의 장이었다. 기존에 한국에 있던 오프라인 거대 기업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이어서 옥션, 인터파크 등 온라인 유통업체들이 나타났다(이들 기업들의 가치는 수십 조원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터넷 사업은 초기에는 원래 수익모델이 거의 없다. 일정 규모의 임계량을 돌파해야 수익이 난다. 그런데 누가 초기 투자 자금을 투입할 것인가? 미국은 나스닥이 자본 조달의 창구 역할을 수행하여 야후,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시스코 등 거대 기업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이머징 투자시장이 없어 인터넷 경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미국 일본 유럽 모두 기존의 오프라인 대기업들이 신경제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사례는 없다. 신경제의 양대 인프라는 청년기업가정신과 벤처투자시장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행운은 코스닥과 벤처기업특별법이라는 두 가지 벤처 육성 인프라를 준비한 후 IMF를 맞이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코스닥은 적자기업의 상장을 허용하고 있어 적자상태의 옥션이나 다음 등의 상장이 가능했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젊은 기업들이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해 아마존과 야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경제가 처음으로 일본을 앞지르는 사례가 인터넷경제에서 발생한 것은 준비된 벤처 정책에 인터넷 코리아 운동이 결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질풍노도와 같은 인터넷산업의 발전 결과, 2000년이 되자 한국은 어느덧 전 세계 인터넷 경제의 최선두에 서게 됐다. 인터넷코리아 운동은 한국판 대공황 극복의 ‘후버댐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글 : 이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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