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컴버블’ 붕괴·反벤처정서 폭발, ‘제2 NHN’키워낼 토대 사라졌다
2000년 들어 벤처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미국 나스닥과 한국 코스닥의 주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았다. 몇몇 전통 기업들은 이름을 ’00닷컴’으로 변경하자 주가가 올랐다. 이상 과열이었다. 이제 벤처의 추락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주식가치가 1조원 이상에 도달한 벤처기업들은 각각 출신 모교인 카이스트 서울대 인하대 등에 후배들의 창업을 지원하기 위한 창업센터를 지어주는 활동을 벌였다. 또 2000년 5월 벤처기업협회는 ‘벤처 나눔운동’에 착수해 29개 공익사회단체를 후원하게 됐다. 메디슨 휴맥스 다우기술 미래산업 옥션 등 많은 1세대 벤처기업들이 2000년에만 2000억원 규모의 나눔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벤처 나눔운동 취지문을 보자. “……벤처기업협회는 학술, 문화, 봉사단체, NGO/NPO, 인큐베이터 상태의 신생단체를 지원하는 나눔 문화 운동을 전개합니다. 최근 산업사회에서 지식사회로 전환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부의 자연스런 이동이 진행되면서 신흥재벌들이 탄생하고 있습니다. 기술개발과 정보, 그리고 미래가치를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벤처기업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었다. 2000년 초 1조원이 훨씬 넘던 벤처들의 가치가 2000년말에는 10%에도 못 미치는 1천억 이하로 대폭락을 하게 됐다. 소위 ‘벤처 버블’의 붕괴였다. 진승현, 정현준, 이용호 등 기업 사냥꾼들이 불법대출과 주가조작, 횡령 등의 수단으로 벤처기업을 인수·합병해 증권시장을 교란시킨 소위 ‘4대 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버블 붕괴로 수많은 선의의 투자자들이 피해를 봤다. 돈 잃고 기분 좋은 사람들은 없다. 반(反) 벤처 정서는 폭발했고, 속죄양이 필요했다. 극히 일부 벤처인들의 룸살롱 출입 등이 언론의 비판을 촉발했다. 대부분의 벤처인들은 죄인들처럼 자세를 낮췄다. 결과적으로 벤처 버블 붕괴의 모든 책임은 벤처인들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 대부분의 순수한 벤처인들을 위한 변명을 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한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코스닥 및 나스닥 주가 추이. 2000년대초 1조원이 넘던 벤처기업의 가치가 2000년말 1천억원 이하로 대폭락했다. 하지만 그림에서 보여지듯 당시 버블의 붕괴는 국내 벤처기업인들의 탓이라기보다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우선 버블 붕괴의 원인을 보자. 당시 버블 붕괴의 원인은 한국 내에 있다기보다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붕괴의 원인을 한국에서 찾아 비난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벤처는 재기의 원동력을 상실하게 됐다. 미국은 버블붕괴 이후에 다시 회복세에 돌입하지만 한국은 2002년 벤처 버블 방지의 일환으로 벤처 인증제도 변경, 코스닥 적자 상장 금지, 주식옵션제의 규제 강화, 엔젤 투자세액 공제 축소 등 4대 ‘벤처 건전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벤처의 재기 발판을 짓밟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는 제2의 NHN도, 휴맥스도 나오지 않았다.
이용호 게이트 등 벤처 비리 사건의 주역들은 벤처인이 아니다. 그들은 기업 사냥꾼들이다. 잡아 먹힌 순진한 벤처 기업인들을 비난하는 것보다는 불법 기업 사냥에 대한 효과적인 규제가 논쟁의 초점이 되어야 하지 않았나 한다. 아직도 불법적인 기업 사냥꾼들이 코스닥을 교란시키고 있음을 상기하자.
벤처인들의 대부분은 이공계 기술자들이다. 기존의 기업 관행을 모르고 원론적인 기업 경영을 한다. 단적인 예가 벤처에는 노동조합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경영자에 대한 신뢰를 입증하고 있다. 필자가 아는 대부분의 벤처인들은 마치 스스로가 노조 조합장인 것처럼 행동한다. 투명경영, 솔선수범, 공동체 의식, 도전문화, 사전 규제의 극소화, 수익 분배 제도 등 수많은 벤처 경영 문화를 보면 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모 방송의 기업가 대담 프로에서 필자와 공동 진행을 맡은 진행자는 “많은 벤처인들을 만나면서 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라졌다” 며 벤처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한 바 있다. 벤처인들 대부분은 안철수 의장 못지않게 도덕적이다.
비록 벤처 버블붕괴로 벤처는 침체기에 들어섰지만 버블시대에 뿌려진 엄청난 기술 씨앗 투자들은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피어나고 있다. 작년에도 1천억원 규모 벤처만 315개에 달하지 않았는가.
글 : 이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