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1930년대에 미국인은 매주 1억 5,000만 시간을 영화 관람에 소비했다. 1946년 당시에는 0.02퍼센트의 가구가 텔레비전을 소유했다. 한국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40년 뒤 2000년에는 각 가정이 보유한 TV를 포함한 전자기기의 수치는 98%로 증가했다. 그것도 전통적인 TV를 기준으로 했을 때이다.
1990년 이후 전 세계에는 국가의 경제수준과 상관없이 디지털 혁명이 불어 닥쳤다. 세계화 이후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각종 전자기기들은 마음만 먹으면 큰 부담을 가지지 않고 소유할 수 있을 만큼 저렴해졌다. 대량생산이 가속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지고, 엄청나게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들이 쏟아져나오면서 소비자들은 점차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소비자로 거듭나게 된다. 제품을 잘 만들어서 잘 광고하기만 하면 쉽게 팔리던 유통의 단방향성은 이제 사라졌다. 모두가 한 곳에 모여 함께 보던 TV는 각 방마다 한 대씩 있을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TV를 보기 위해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오히려 함께 보는 TV를 집에서 빼는 일마저 생기고 있다.
이제 스크린은 개인의 손안으로 옮겨갔다. 개인의 손에는 TV시청 기능은 물론 화상통화 기능과 각종 메세징 기능을 기본으로 가지는 휴대폰이 널리 보급되었고 카메라나 캠코더, MP3, PMP등은 가지고 있어도 소유했다는 기쁨을 느끼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TV를 보기 위해, 전화를 하기 위해, 대화를 하기 위해서 특정 공간에 모이지 않는다. 모바일/스마트 기기는 어느새 산업의 중심이 되었으며 휴대폰이 없는 사람이 전혀 없을 정도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거나 열심히 업무에 몰입하고 있는 때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나 휴대폰을 들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으면 상대방이 화를 내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손에는 각자 하나씩 스크린이 쥐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드넓은 세상에 홀로 떠 있는 자기 자신을 어느 때보다도 극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개인화의 극단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혼자임을 자각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하던 공동체의 세상에서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으로의 경험. 때문에 사람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끊임없이 외부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게 된다. 남들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어떻게 비쳐질까가 최고의 관심사가 된 세상.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롭다. 공동체가 곧 나 자신이었던 시대에서 나 자신이 곧 세상인 시대로의 극적인 변화, 조직 속에 나를 묻어가기만 하면 되던 시절에서, 발가벗겨진 듯 나 자신이 세상에 드러나버리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확실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의 중심에 나 자신을 내놓고 사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인생의 비전, 목표, 성공. 여기에 내가 없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런 인식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지 않음을 절감하게 만들어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과거에는 튀면 안 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머리가 길어도 안 되고, 남들과 다른 옷을 입거나 행동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튀어 보이면 호되게 정을 맞았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뭐지?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지? 왜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걸까. 우리는 점점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함께 있지만 모두가 홀로 있는 세상이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는 휴대폰 없이도, 문자 메시지 없이도, 인터넷이 없이도 잘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라도 이것들로부터 단절되면 타 들어가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휴대폰 없이 외출하거나 출근했을 때 하루 종일 마음이 불안하고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 정말 중요한 메시지를 못 받을까 봐서 그런 걸까. 이미 일상생활에서 인터넷이나 휴대폰은 우리 존재의 일부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따라서 그것과의 단절은 나의 한 부분이 죽어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완전히 연결되었지만 완전히 홀로 존재하는 공존의 세상. 이것이 바로 현대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개인화의 극단은 무엇일까? 외로움의 끝은 더욱 심화된 외로움일까? 아니다. 개인화의 끝은 외로움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단계로의 서막이었다.
지금 인류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개인화의 끝을 외로움, 고독, 고립감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이를 전혀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른바 ‘뉴 르네상스’가 바로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르네상스는 14-17세기에 일어났던 인류사적 대 사건이었다.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수많은 작가,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 발명가 등이 등장하였고, 이들이 이끌어낸 작품과 업적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정도로 인류의 사상과 가치, 문화에 큰 획을 그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가장 큰 축은 바로 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라는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고, 자신이 속한 종교나 단 하나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 만나고 지식과 문화를 교류하면서 급격히 똑똑해지기 시작했다. 지식과 정보가 늘어났고, 급기야 그 수준은 당시의 권력자들을 뛰어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스마트’의 본질이다. 사람들이 똑똑해진 것이다.
인간은 외로워진 것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익명성 속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간이 개인화되는 만큼, 그리고 외로워지는 만큼, 우리는 내가 속해 있는 집단과는 상관없는, 나 자신의 솔직한 생각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인프라가 갖춰지면서 인류는 새로운 ‘나 자신으로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단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 안에 우겨넣을 수 없다. 사람들의 수만큼 사람들의 생각은 각각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게 된다. 그런 다양한 스펙트럼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면 진정한 소통을 비로소 나눌 수 있게 된다. 개인화의 빅뱅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스마트 혁명의 본질이다. 황창규 단장이 이끄는 지식경제부의 ‘스마토피아’는 이런 면에서 바로 신 인류의 르네상스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 : 송인혁
출처 : http://everythingisbetweenus.com/wp/?p=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