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생의 한 청년이 있다. 그의 나이 18세이던 1999년. 인터넷에선 좋은 음악을 발견하기도 어렵고 공유하기는 더더욱 불편하다며 그 불만을 해결해보겠노라 코딩을 시작했다. 내리 60시간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결국 음악 산업을 뒤바꾸는 혁명적인 사고를 치게 된다. 바로 Napster다.
주인공은 Shawn Fanning. 보스턴 북동부 대학에 재학중이던 Fanning은 개발에 심취해있던 청년이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인터넷에 들어갔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찾을 수가 없었다. 좋은 음악은 더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이걸 도와주면 좋아하겠거니 하며 호기심에 Napster 개발에 나섰다.
개발에 앞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물어보기도 했다. 돌아온 대답은 콧방귀뿐이었다. “음악은 자기만의 영역이고 공유하길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핀잔도 들었다. 개발해봐야 사람들이 오지도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저 믿음이었다. 음악 산업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토대로 내린 결론도 아니었다. 그저 듣고 싶은 걸 인터넷에서 듣고 싶었을 뿐이다. 논리적으로 표현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평범한 10대였다.
18세 청년의 고민 ‘인터넷에서 좋은 음악 발견하고 공유할 순 없을까
그의 최종병기는 Dell 노트북 한 대였다. 특별히 사무실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삼촌네 사무실의 쇼파와 바닥이 그의 작업실이었다. 사람들의 콧방귀를 뒤로 하고 일단 개발에 착수했다. 모두 1999년 중반에 벌어진 일이다. Fanning은 이미 존재하던 기술들을 접목하고 활용했다. 메신저 프로그램인 Internet Relay Chat과 MS 윈도의 파일 공유 기능, 다양한 검색 엔진의 고급 검색과 필터링 능력을 십분 써먹었다. 그리고 세상에 Napster를 내놓았다. 이렇게 음악 산업의 새 역사가 시작된다.
Fanning은 1999년 5월 대학을 그만둔다. 주식회사 Naspter를 설립하기 위해서다. 이 때부터 Sean Parker 와 John Ritter와 함께 하게 된다. Sean Parker가 공동 창업자인지 초기 멤버인지는 아직 확실지 않다는 설이 많다. 여하튼 이 때부터 그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탄생 과정이 어찌됐든 Napster는 전통적인 음악 산업 전체를 회오리 속으로 빠트렸다. Napster의 블랙홀로 빨아들였다고 기술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물론 Naspter가 등장하기 전에 음원 다운로드 서비스가 있었다. 하지만 무겁고 느리고 번거로웠다. 당연히 학생들이 접속해 사용하기엔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뭔갈 찾기도 낯설었다. 이미 CD음질을 보장하는 MP3 파일 포맷은 87년에 등장했지만 이렇다할 쓰임새를 찾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미 기술적 수준은 멀찌감치 앞서가고 있었다. CD로부터 음원을 추출해 MP3 파일로 변환하는 게 가능한 대였다. 다만 빨라진 컴퓨터, 고속인터넷망에 깔렸음에도 MP3 파일을 찾고 CD를 조각조각 내 MP3로 만드는 과정은 지루하기만 했다.
기존 mp3 서비스는 느리고 무겁고 지루해
Fanning의 아이디어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그는 누가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재빨리 개발에 착수했다. 복잡한 기능 모두 빼고 그저 노래를 다운받고 들을 수 있는데만 집중했다. 학교도 가지 않았다.
Napster가 등장하자 입소문을 타고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 속도는 그가 감당하기에도 너무 빨랐다. 응축돼 있는 불만과 요구가 모두 Napster로 분출되는 듯했다. 하루하루 늘어나는 사용자는 측정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였다.
매일매일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마침내 거대한 장벽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1999년 12월 7일, RIAA(전미음악산업협회)는 Napster를 향해 소를 제기한다. 당시 RIAA 부회장이었던 Cary Sherman의 얘기를 들어보자.
“냅스터는 불법 복제를 촉진하고 예술가와 저작권 소유자의 업적에 기대 사업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냅스터는 거대한 온라인 해적 시장과 유사하다. 사용자들에게 대규모 저작권 침해 행위에 동참시키는 수단이 됐다”고 비난한다. 비난이기보단 엄포에 가까웠다. 2000년 6월 RIAA가 Napster에 제기한 소송에 대해 법원은 서비스 중단 예비명령을 내린다. 명분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불법적인 음원 유통. 이때부터 서비스에 제약이 가해졌다.
하지만 Napster는 소문을 타고 더 크게 성장하게 된다. RIAA의 법적 조치가 오히려 인기를 폭발시킨 셈이다. 2000년 9월께 Napster 사용자는 670만명에 이르게 된다. 대형 레이블도 불안감을 느끼게 됐고, 이 가운데 한 곳인 베텔스만이 먼저 손을 내민다.
RIAA 소송과 서비스 중단 예비명령 소식에 사용자 폭발
BMG. 지금은 소니BMG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독일 Bertelsmann Music Group의 약자다. 2000년 10월. Napster는 Bertelsmann eCommerce Group과 공동으로 상업적인 유료 콘텐츠 플랫폼을 개발하는데 동의한다. 그 대가로 BMG는 Napster에 가해진 법적 조치를 취하하기로 한다.
이보다 앞선 10월 2일, Shawn Fanning은 타임 매거진 커버 인물로 소개된다. 불과 1년여만에 세상을 뒤바꾼 20세 청년으로 그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리게 된 것.
잠시. 2000년 10월이면 애플이 음악 시장 진출을 위해 SoundJam MP 개발한 측과 접촉을 시도하던 시점입니다. 스티브 잡스도 Napster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을 때겠죠. Napster와 BMG가 손잡은 뉴스에 긴장감도 느꼈을 겁니다. 뭔가 모르게 음악 산업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을 테고요.
출처 1 : http://www.mtv.com/news/articles/569952/riaa-sues-napster-piracy.jhtml
출처 2 : 타임 매거진(http://www.time.com/time/magazine/article/0,9171,998068,00.html)
출처 3 : 냅스터의 역사(http://www.wiwi.uni-frankfurt.de/erp/pdf/Napster_History.pdf)
글 : 몽양부활
출처 : http://blog.muzalive.com/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