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퀴즈 하나를 내고 시작해보자. 프로젝트에서 만드는 산출물 가운데 실제 개발에는 도움을 주지 않지만 들어가는 노력이 상당히 많은 건 무엇일까? 물론 정답은 없다. 사람이나 프로젝트에 따라 다르지만 내 경험에 비춰 생각해 보면 매뉴얼이 그렇다. 매뉴얼은 정말로 손이 많이 간다. 물론 프로젝트에 따라 매뉴얼을 작성하는 사람이 프로젝트 외부에 있을 수도 있지만 보통 프로젝트 팀 내에서 매뉴얼을 만든다. 사실 매뉴얼은 프로젝트가 종료될 시점에 만들기 때문에 팀에 큰 부담이 없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화면을 캡처해 화면마다 설명 이미지를 넣고 그걸 문서로 만들다 보면 상당한 자원이 들어간다.
물론 열심히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사용자가 잘 읽어 보고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때 도움을 받으면 그걸로 만족이겠지만, 내 경험을 보더라도 시스템을 사용하면서 막혔을 때 매뉴얼을 읽으면서 도움을 받았던 경우가 별로 없다. 매뉴얼에 적힌 정보는 상당히 뻔한 내용이어서 굳이 매뉴얼을 읽어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많았다. 정작 시스템을 사용하면서 곤란을 겪으면 헬프 데스크나 개발자를 찾아서 문제를 해결했다.
시스템이 업그레이될 때 매뉴얼도 함께 수정하면 그나마 매뉴얼이 의미가 있지만 대부분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와 매뉴얼이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했다. 매뉴얼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매뉴얼을 두고 시스템을 사용해 보면서 얻은 결론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매뉴얼은 차라리 만들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매뉴얼을 만들지 않자니 뭔가 개운하지 않다. 그렇다면 매뉴얼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묘한 뒷맛을 느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은 아이폰이 대세라 모든 휴대폰이나 스마트폰이 아이폰을 기준으로 평가받는다. 잠시 아이폰이 대세인 세상을 잊고 연아폰이나 햅틱폰처럼 피처폰이 대세였던 때로 돌아가보자. 아이폰 가격과 맞먹는 피처폰을 2년 약정으로 사와서 포장을 뜯을 때마다 항상 보게 되는 부속품이 있다. 바로 매뉴얼이다. 피처폰의 다양한 기능을 설명해둔 매뉴얼은 상당히 두껍다. 제품박스가 작아서 가로, 세로 크기를 늘릴 수 없기에 두께가 상당하다. 이 매뉴얼을 볼 때마다 휴대폰에 기능이 참 많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만 할 뿐 실제로 매뉴얼을 읽어 보진 않았다.아이폰을 처음 샀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꿈에도 그린 아이폰을 드디어 우리나라에서 써볼 수 있다는 기분 때문이기도 하지만 포장을 뜯었을 때 본 매뉴얼 때문이다. 아이폰도 휴대폰인지라 기능을 설명하는 매뉴얼이 있었지만 그 분량이 정말 적었다. 기존 휴대폰의 매뉴얼과 비교했을 때 10분의 1도 채 안 되는 분량이었다. 아이폰의 기능을 생각하면 휴대폰보다 기능이 더 뛰어날 텐데도 설명서의 분량이 상당히 적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렇다면 왜 아이폰의 매뉴얼은 일반 피처폰의 매뉴얼보다 분량이 적을까?
답은 아이폰은 매뉴얼이 필요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UI가 직관적이어서 굳이 매뉴얼을 찾아 기능을 공부하지 않아도 한 번 보면 누구나 쓸 수 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매뉴얼을 만들지 않아도 될 힌트를 아이폰에서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만드는 소프트웨어를 직관적이고 쓰기 쉽게 만들면 된다. 다시 말해, 소프트웨어 자체에 매뉴얼이 담겨 있으면 된다.
명백한 것은 빼고 의미 있는 것을 넣으라는 말이 있다. 매뉴얼이 필요 없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관점에서 이 말을 해석하면 이렇다. 명백한 매뉴얼이 없어도 시스템의 UI가 뛰어나서 UI만 보고도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다 보니 우리가 만든 시스템 때문에 고생할 사용자를 위해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에 출판된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리스타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