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당시 그의 나이 33살. 밀양 출신의 한 낯선 고졸 청년이 벅스뮤직을 창업한다. 그것도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다. 사실 벅스의 탄생 스토리는 알려진 정보가 예상 외로 적다. 한때 온라인 음악 서비스를 좌우할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창업 스토리가 언론을 통해 깊이 있게 소개된 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2003년 4월까지 부산에 본사를 둔 탓에 언론의 보도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랬다손 치더라도 이상하리만치 벅스의 행적은 주목을 받지 못한 듯 보인다.(혹 자료가 있다면 링크를 남겨주시기 바란다.)
그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조선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창업 전까지 비디오방, 인터리어, 카페 등을 운영했다. 그러다 97년, 31살이 되던 때 PC방 사업을 시작한다. 그와 음악의 우연적 만남이 시작된 계기였다. 당시는 PC방 초창기로 인터넷 보급이 막 시작될 즈음이기도 했다.
PC방 사업에 흥미를 붙인 덕인지 그는 PC방 체인의 연합 조직인 ‘한국인터넷플라자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다 PC방 직원들의 아이디어로 본격적으로 음악 사업에 뛰어든 들게 된다.
당시 미국에선 Napster 열풍이 한창일 때다. 그가 Napster의 소식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 산업 전체가 혁신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고 그 속에서 새로운 거점을 창조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경향은 알고 있었을 터다.
그의 발상은 제법 혁신적이었다. P2P 방식으로 음악 파일을 공유하던 흐름에서 살짝 비켜나 스트리밍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했기에 그렇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도 스트리밍 방식으로 대중적인 온라인 음악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여튼 그의 접근과 직원들의 아이디어는 적중했다. 2000년 2월 벅스뮤직이라는 서비스가 문을 연 지 불과 10개월 만에 사용자가 286만명을 돌파한다. 단 10개월 만의 성장세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 마침내 500만을 돌파하면서 각종 인터넷 음악 서비스 가운데 1위를 휩쓸게 된다.
성장세로 따지면 최근 카카오톡에 미치지는 못한다. 알려져있다시피 카카오톡은 2010년 3월 출시 뒤 10개월 만인 2011년 1월 600만명을 돌파한 바 있다. 그럼에도 당시 음악 서비스로서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며 일약 스타 서비스 반열에 올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작 유명세는 소송에서 비롯된다. 2001년 벅스뮤직이 이름을 드날리던 그 해 11월 자작권법이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부산지검 이원석 검사는 박성훈 대표를 저작권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이때부터 벅스뮤직의 줄소송 역사가 시작된다. 다음해 7월에는 5대 음반사가 벅스뮤직을 향해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PC방 직원들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벅스뮤직은 불과 1~2년만에 승승장구를 거쳐 결국 저작권법 앞에서 무릎을 꿇을 상황에 처한 것이다. 마치 Napster의 우여곡절의 전철을 밟는 듯했다.
(다음회로 이어집니다.)
글 : 몽양부활
출처 : http://blog.muzalive.com/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