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스크린’이라는 대유행어가 있습니다. 하나의 서비스 또는 컨텐트를 여러 단말에서 단절감 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뜻으로 주로 쓰이고 있죠.
이 용어가 만들어지는 현장의 당사자였던 한 사람으로서, 이 말의 모호함과 그 뒤에 숨겨진 속 뜻에 대해 뭔가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 말이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부터 살펴보고, 이 용어에서 느껴지는 찝찝함을 이제는 좀 털어버리고 싶습니다.
‘N 스크린’은 통신 회사의 유산
N 스크린이란 용어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N 스크린이란 용어의 직계 부모는 ’3 스크린’입니다. 3 스크린이란 짐작하시다시피, 모바일, PC, TV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가장 적극적으로 쓰던 그룹은 바로 통신 회사였습니다. 왜냐, 그건 바로 통신사가 찾는 새로운 먹거리를 그 세 스크린의 통합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포털들이나 제조사들도 그런 먹거리엔 관심이 많았지만, 통신사만큼 적극적이고 주도적이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통신 회사들은 모바일이나 PC로의 파이프라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통한 새로운 서비스, 새로운 수익 창출을 모색하는 것이 지상 과제였고-물론 지금도-, 여기에 하나 남은 소비의 보고, TV 스크린까지 세 스크린을 통합한 플랫폼을 일찌감치 꿈꿔왔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통신사의 TPS(Triple Play Service) 즉 인터넷, 전화, 방송 통합 서비스 사업을 3 스크린의 원조로 오해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TPS는 세 가지 서비스를 단순히 결합한 상품이지 여러 단말 환경에 융합된 서비스 개념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바일을 더해 QPS(Quadruple – )라 불렸던 사실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죠. 세 스크린의 융합을 도모했던 것은, 대략 2000년대 초에 시작되어 중반 즈음에 피크를 이루었던, ‘디지털 홈’ 또는 ‘스마트 홈’ 사업입니다. 보통은 디지털 홈 사업을 원격 제어 정도의 서비스로 평가 절하하긴 하지만, 실은 모바일을 제외한 스크린이 모두 ‘집’에 있었기 때문에, 예를 들어 모바일 회사의 입장에선 ‘홈’이 바로 차세대 타겟 시장이 된 겁니다. 즉, 내막은, 모바일을 꽉 잡고 있으니 이제 PC와 TV 스크린도 장악하고 싶다는 것이죠. 그 이상향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유비쿼터스(ubiquitous)‘입니다. 기획자에겐 마치 유토피아라는 말과 비슷한 어감, 비슷한 수준-이상향-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죠.
유비쿼터스만큼 사용자 중심의 소비 이상향을 잘 표현한 말도 없습니다. 지금 모두가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소비 모델도 결국 이 말로 다 설명이 됩니다. 용어도 유행이라 요즘은 잘 사용되지 않아 아쉬울 따름입니다만, 사실은 이 이상향의 단어에서 거품을 털어낸 것이 ‘N 스크린’입니다. 원래 유비쿼터스라는 말은 스크린의 편재성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사용자를 둘러싼 모든 센서 네트워크를 포함한 것입니다. 즉, 사용자의 컨텍스트를 네트워크가 감지하고 이해하여 적절한 서비스의 인터랙션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환경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바로 디지털 홈이었고, 거기에서 나온 못난 자식들이 하찮은 ‘원격 보안, 원격 제어’ 정도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에는 언제나 괴리가 있습니다. 이 괴리를 채우려던 거품을 털어내고 나니, 사용자의 눈, 즉 스크린에 집중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3 스크린에 어떻게 컨텐트를 잘 전달해 줄 것인가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용어도 자연스럽게 ’3 스크린 서비스’라는 말로 대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가장 심각한 용어인 N 스크린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정말 하찮은 이유였고, 정말 별 생각 없는 작명이었습니다. 3 스크린 서비스를 고민하다 보니, 또 다른 스크린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디지털 액자나 디지털 사이니지 같은 것들입니다. 제4의 스크린이 등장할 가능성이 충분한데, 왜 3 스크린이란 용어에 갇혀 있어야 하느냐, 좀 더 스크린의 시야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럼 어떻게 부를 것이냐, 수학에서 1, 2, 3 다음의 모든 정수를 ‘n’ 값이라 하니 일단 ‘N 스크린’으로 칭한 것입니다. 정말 이건 스크린이 “1, 2, 3, … 많다”의 단순한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N이 ‘Network’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설명은 정말 꿈보다 해몽!)
무르익은 제4 스크린, 하지만 여전히 N <= 4
사실 제4의 스크린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이미 개방 플랫폼인 제2 스크린, PC에서의 제어력이 너무나 미약했고, 제3 스크린, TV에서의 고전이 큰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TV 같은 경우는 지금도 어려운 것을 2000년도 초중반에 하려고 했으니 얼마나 걸리는 것이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스크린에 눈을 돌리기도 했는데, 그게 디지털 액자나 스크린이 달린 집 전화 같은 것이었죠. 어쨌든 이런 스크린은 결코 대중화되지 않은 스크린이었기 때문에, ‘N 스크린’이라는 용어도 내부 보고서 외에는 사용되지 않는 그런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애플이 아이패드를 발표하면서 일대 변혁이 일어납니다. 진정으로 모바일-PC-TV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대중적인 스크린 카테고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즈음, ‘클라우드 컴퓨팅(Cloud Computing)’이라는 말이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그 권좌를 바꿔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슬슬 ‘N 스크린’이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아이패드와 클라우드가 그 용어를 정착시키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죠.
하지만 대중적인 스크린의 의미에서 보면, N 값은 여전히 4를 넘지 못합니다. 3 스크린 중, 모바일은 ‘스마트폰’이 되고, PC는 ‘웹’이 되고, TV는 ‘스마트TV’가 되었고, 여기에 아이패드가 추가되었을 뿐이니까요. 그러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4 스크린이라고 불러야겠죠. 게다가 TV는 대중적이지만, ‘스마트TV’는 대중적이라고 볼 수가 없죠. 따라서 실상은 여전히 2~3 스크린이고, 4 스크린은 희망 사항이고, N 스크린은 언감생심입니다. 게다가 요즘엔 서비스를 런칭해야 하는 개발자적 입장에서 ‘스크린=플랫폼’으로 인식해, N 스크린을 멀티 디바이스의 다른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N 스크린의 직관적 어감은 단순히 “다양한 스크린”이지만, 애당초 출발은 “사용자가 언제 어디에 있든” 접속할 수 있는 수단을 얘기한 것이었습니다. 즉, 사용자가 바라보는 서비스는 어디서나 하나이고, 그것을 보는 창문이 어디에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창문이 많다는 것은 기술적 또는 비용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일 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상파의 N 스크린 서비스로 선전되고 있는 ‘푹(pooq)’ 같은 경우는 인당 허용되는 단말의 개수를 일부러 제한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에겐 서비스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스크린보다는 클라우드나 개인화 같은 플랫폼이 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지요.
‘N 스크린’은 크로스 & 멀티 플랫폼 전략
플랫폼의 측면에서 보지 않으면 N 스크린 전략은 오류를 낳기 쉽습니다. N 스크린은 플랫폼 적으로 2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스 플랫폼(cross-platform)’이고 다른 하나는 ‘멀티 플랫폼(multi-platform)’입니다. (실은 원래 이 두 용어가 의미상 뚜렷이 나누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만, 설명을 위해 의미를 달리 정의해 봅니다.)
그림을 설명하자면, 우선 스크린을 가지고 있는 단말을 클라이언트인 프론트 엔드 플랫폼(front-end platform), 서버인 백 엔드 플랫폼(back-end platform)이라고 합시다. 프론트 엔드는 스마트폰, 스마트TV, 웹브라우저, 아이패드 같은 것들이 되겠죠. 이게 흔히 말하는 N 스크린. 여기에 백 엔드는 이들 스크린을 넘나들며 같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플랫폼이 되겠죠. 예를 들면 클라우드 서비스가 그런 역할을 하게 되겠죠.여기서 사용자 관점의 플랫폼을 두 가지로 구분해 봅시다. 하나는 한 사용자의 행동반경을 커버해 주는 것으로 이를 퍼스널 커버리지(personal corverage)라 명명해 봅니다. 다른 하나는 다양한 소비자들의 접근성을 커버하는 것으로 이를 퍼블릭 커버리지(public coverage)라 합시다.
말하자면, 퍼스널 커버리지를 확보하는 것이 크로스 플랫폼 전략이고, 퍼블릭 커버리지를 확보하는 것이 멀티 플랫폼 전략입니다. 즉, 한 사용자의 소비 궤적을 따르는 다양한 플랫폼에서 상이하지 않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크로스 플랫폼이고, 최대한 많은 사용자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많은 플랫폼을 지원하는 것이 멀티 플랫폼입니다.
굉장히 당연한 얘기죠. 하지만 이 당연한 얘기를 제대로 구현해 내고 있는 서비스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단말마다 제공되는 컨텐트가 상이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크로스 플랫폼의 소비가 상당히 제한되는 사례입니다. 또는 지원되는 플랫폼 자체가 대중성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멀티 플랫폼 전략에 실패한 사례가 되겠지요. 물론 컨텐트나 단말이나, 크로스/멀티 플랫폼 전략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비용적으로 또 산업 역학적으로 걸리는 문제가 아직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 몇몇 단말에 컨텐트도 제한적인 서비스만으로 ‘N 스크린’ 서비스 운운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진정한 N 스크린을 위한 크로스/멀티 플랫폼의 모범 사례가 바로 넷플릭스(Netflix)와 훌루(Hulu)죠. 하지만 이들 서비스를 설명할 때, ‘N 스크린’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보단 일반적으로 OTT(over the top) 서비스라고 표현을 하죠. 이 용어의 차이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OTT는 네트워크 종속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의미이고, N 스크린이라는 용어는, 전술했듯이, 네트워크 사업자의 직접적인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국에서는 이런 서비스들이 통신사나 방송사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정으로 이 저렴해 보이는 용어인 N 스크린이 대유행하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단순한 용어가 소비자들에게도 이해가 빠르니 꼭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겠습니다만)
누가 주도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죠. ‘어떻게 하느냐’에서 길을 잃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용어가 주는 모호함 때문에 말이죠. 저는 유비쿼터스에서 N 스크린이 걷어 낸 그 거품에 어느 정도 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유비쿼터스같은 이상향의 용어가 다시 등장하게 되도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고 반가와할 것 같습니다.
글 : 게몽
출처 : http://bit.ly/OUOkv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