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ary: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다. 상사가 더 힘들 때도 많지만, 공감을 하지 못하는 상사 밑에서 일하는 부하직원들 또한 죽을 맛이다. 권력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사와 부하로 대하게 되는 마지막 모습이 아닐까?
1. 낭시 대학 행동 생물학 연구소 실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은 백과사전 형식으로 단편적인 지식들이나 인사이트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는데, 그 내용중에는 사실(fact)가 아닌 허구의 것들도 꽤 포함되어 있는 소설과 백과사전의 중간 형태의 책이다. 이 책은 그의 다른 소설들에 종종 인용되며, 그 중에는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낭시 대학 행동 생물학 연구소의 한 연구자가 쥐들의 수영 능력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다. 「동물의 사회 행동」이라는 저서를 낸 바 있는 이 연구자의 이름은 디디에 드조르는 쥐 여섯 마리를 한 우리 안에 넣었다.
우리의 문은 하나뿐이고 그마저도 수영장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먹이를 나눠 주는 사료 통은 수영장 건너편에 있었다. 따라서 쥐들이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헤엄을 쳐서 수영장을 건너야만 했다. 여섯 마리의 쥐들이 일제히 헤엄을 쳐서 먹이를 구하러 갔을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이내 확인되었다. 마치 쥐들 사이에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섯 마리의 쥐는 다음과 같은 네 부류로 나뉘었다. 두 마리는 수영을 해서 구해 온 먹이를 빼앗기는 피착취형이었고, 다른 두 마리는 헤엄을 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남이 구해 온 먹이를 빼앗아 먹는 착취형이었으며, 한 마리는 헤엄을 쳐서 구해 온 먹이를 빼앗기지도 않고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는 독립형이었고, 마지막 한 마리는 헤엄을 치지도 않고 먹이를 빼앗지도 못하는 천덕꾸러기형이었다.
먼저 피착취형에 속하는 두 쥐가 먹이를 구하러 가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우리로 돌아오자, 착취자들은 그들을 공격해서 애써 가져온 먹이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피착취자들은 착취자들이 배불리 먹고 나서야 남은 것을 먹을 수 있었다. 착취자들은 헤엄을 치는 법이 없었다. 그저 헤엄치는 쥐들을 때려서 먹이를 빼앗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독립적인 쥐는 튼튼하고 힘이 세기 때문에 스스로 헤엄을 쳐서 먹이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착취자들의 압력에 아랑곳하지 잃고 노동의 대가를 온전히 누렸다. 끝으로 천덕꾸러기 쥐는 헤엄을 칠 줄도 모르고 헤엄치는 쥐들에게 겁을 줄 수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다른 쥐들이 싸우다가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주워 먹을 수밖에 없었다.
드조르는 스무 개의 우리를 만들어서 똑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어느 우리에서나 똑같은 역할 배분, 즉 피착취형 두 마리, 착취형 두 마리, 독립형 한 마리, 천덕꾸러기형 한 마리가 나타났다.
드조르는 그러한 위계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착취형에 속하는 쥐 여섯 마리를 따로 모아서 우리에 넣어 보았다. 그 쥐들은 밤새도록 싸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들의 역할은 똑같은 방식으로 나뉘어 있었다. 피착취형이나 독립형이나 천덕꾸러기형에 속하는 쥐들을 각 유형별로 여섯 마리씩 모아서 같은 우리에 및어 보았을 때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드조르는 더 커다란 우리에 2백 마리의 쥐들을 및어서 실험을 계속했다. 쥐들은 밤새도록 싸움을 벌었다. 이튿날 아침 세 마리의 쥐가 털가죽이 벗겨진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결과는 개체 수가 증가할수록 천덕꾸러기형의 쥐들에 대한 학대가 가혹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낭시 대학의 연구자들은 이 실험의 연장선에서 쥐들의 뇌를 해부해 보았다. 그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쥐는 천덕꾸러기나 피착취형 쥐들이 아니라 바로 착취형 쥐들이었다. 착취자들은 특권적인 지위를 일고 노역에 종사해야 하는 날이 올까 봐 전전긍긍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5권」
위의 예화는 ‘착취형’ vs. ‘비착취형’의 구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일반적인 시각에서 보면, 단순히 일을 하는 사람보다는 일을 시키는 쪽에서 더 고민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나 업무가 단순화될 수록 일을 ‘시킴 받아서’하는 사람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업무를 지시하는 사람들이 좀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내 주변의 많은 창업가들은 회사가 좋을 때나 어려울 때나 ‘월급쟁이’들이 더 부럽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직원들에게 이번 달 월급은 줄 수 있을까? 에 대해서 고민하다보면, 어쨌든 매달 월급이 나오는 직원들의 사정이 부러운 모양이다. 자기 사업체와 종업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고민은 정말 우리 같은 월급쟁이들은 알 수 없을 정도의 중압감과 복잡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2. 상사가 더 눈치본다.
몇년 전에 미국에서 대학 교수를 하던 형이 힘든 일이 있다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형의 연구실에 있는 박사과정 조교 학생과 형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박사과정 학생은 형이 시키는 일만 해오고, 그 이외의 다른 일들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인듯 했다. 형은 그 학생에게 답답함을 느꼈고, 좀 더 능동적으로 일을 처리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 박사과정 학생은 형의 그런 속을 잘 모르는 듯 했다. 몇 번이고 깊이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이야기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형이 교수라고 해서 자신의 학생을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무리 답답해도 왠만하면 그 학생이 잘 해서 졸업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년인가 공부를 가르치고 형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여기까지 왔기에, 이 상태에서 자르게 되면 형이 입게 되는 데미지도 너무 크다고 했다. 당장 그 학생이 없으면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도 있고, 단기적으로 형 자신의 몸과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이다. 형은 그러면서 이렇게 투덜거렸다.
‘사실 알고보면 교수가 학생들 눈치를 더보는거야….’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대학에서의 교수와 제자의 관계가 회사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놀랐다. 회사에서도 아무리 답답한 부하직원이 있어도 그 부하직원이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 상사의 몸과 마음이 괴로울 때가 많다. 물론 정말 참을 수 없이 일을 못하고, 팀에 부담만 되는 경우라고 하면 권고 사직이나 명예퇴직도 고려해 볼만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의 인지상정 문화에서는 이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적어도 그 부하직원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상사를 만나서 ‘두번째 기회’, ‘세번째 기회’를 더 갖고 난 다음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피를 묻혔으면..하고 바라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나라 회사원들의 마음일 것이다.
한 임원분이 주변에 좋은 사람 있으면 좀 추천해 달라고 부탁할 때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찾아서 헤매는 이유는 회사를 위해서 좋은 인재를 뽑고 어쩌고 하는 것은 사실 다 ‘변명’일 뿐이고, 정말로 자기 자신의 몸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상사에게 부하는 자신의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이다. 상사에게 부하직원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몸이 두개가 아니라서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을 대신해서 해 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좋은 부하직원이 있어야만 상사의 몸과 마음이 편한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슈퍼스타 부하직원은 상사에게는 때로는 껄끄러운 존재이다. 상사로서 부하직원이 일을 잘 하면 한없이 좋아야 하지만, 점점 더 몸값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프로페셔널 기업으로 갈 수록 나의 역할까지 모두 해 내면서 나보다 적은 연봉을 받는 부하직원은 나에게는 잠재적 경쟁자로 돌변해 버린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앞서 언급한 직장 상사로서 갖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부하직원에 대한 의존성은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전혀 해 보지 않은 사람들, 혹은 짧은 직장생활만 했기에 부하 직원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사람들로서는 상사가 되면 마냥 좋을 것 같기에 이런 점들은 우리의 직관과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
물론 상사와 부하라는 맥락에 국한되어 보았을 경우에 부하직원들은 부하직원들 나름대로 상사에 대한 불만이 있다. 가장 큰 불만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가장 크게 나누면 1) 돈, 2) 사람, 3) 업무 로 볼 수 있다.
첫째로 나 자신을 상사와 비교할 때에 내가 지나치게 낮은 임금으로 남용되고 있다고 느낄 때이다. 분명 나의 상사의 대부분의 실무는 내가 처리하고 있는데, 나는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이다. 두번째는 상사가 나에게 귀감이 되는 멘토내지는 롤모델로서의 역할을 전혀 해주지 못하는 경우이다. 마지막은 내가 하는 업무에 있어서 공평한 기회로 배분받은 것이 아니라서 나의 가치가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경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상사와 부하의 관계는 실제로 이면에는 매우 복잡한 역학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3. Asshole은 자신이 Asshole인지 모른다.
영어로는, 제멋대로이고,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는 캐릭터를 ‘Asshole’이라고 한다. 한국말로 옮기면 ‘똥꼬’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도 모두 가치 없는 이야기들이고, 그 사람이 지나간 자리엔 우리가 치워버려야할 쓸데없는 일들만이 남는다는 면에서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사들을 이 글에서는 똥꼬들이라고 부르겠다.
이러한 똥꼬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들이 똥꼬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수백명의 택시기사들에게 자신들의 운전 실력을 평균이상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설문을 한 연구가 있다. 실제로 이 설문에 응답한 택시기사들의 80% 이상이 자신의 운전실력을 평균 이상이라고 응답했다. 마찬가지의 실험을 대학교수들을 상대로 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온다. 자신의 강의 실력을 스스로 평가하라고 하면, 90% 가까운 대학교수들이 ‘평균 이상’이라고 평가한다. 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
똥꼬들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스탠퍼드에서 기업조직에 대해서 연구하는 로버트 서튼교수가 쓴 책 중에서 직장생활에서의 상사와 부하관계를 다룬 굿 보스 배드 보스(Good Boss Bad Boss)라는 책을 보면, 여러가지 연구들이 소개되는데, 그 가운데 똥꼬들에 관련된 이야기가 꽤 있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 행복, 고뇌, 불행 등을 느끼는 ‘공감능력’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능력이 아주 뛰어난 사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공감능력이 저하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공감’의 능력을 저하시키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권위’라는 것이다. 아무리 공감을 잘 하던 사람도 권력과 권위를 손에 쥐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이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처해 있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리더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본다. 불과 엊그제까지 내가 하고 있던 일을 하던 사람인데, 승진을 했다고 해서 이 업무의 어려움을 몰라준다. 이러한 ‘공감결핍’은 생각보다 심각한 이슈다.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연쇄 살인마 같은 사람들을 싸이코패스(Psychopath) 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공감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자신이 죽이는 상대방이 느끼는 고통이나 그 가족들이 느낄 불행에 대해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기에 그렇게 연쇄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일하고 있는 직장 상사들중에 싸이코패스가 많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권위로 인해서 공감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만큼 심각하고 어려운 문제라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부하직원들의 가장 큰 의무이자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 행동은 똥꼬들에게 그들이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객관적인 판단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동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과 같아서 실무에서 일어나기는 쉽지 않다. 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부하직원들이 서로간에 눈치를 보면서 누군가 나서주기를 바라지만, 결국은 일어나지 않는 허무함으로 끝날 때가 많다. 무엇보다 큰 심리적 장애물은 내가 직언을 했다가 윗 상사가 꽁한 성격을 보이면서 두고두고 나의 지적을 가슴에 아로새겨 놓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이다. 그럴땐 용기를 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1) 그런 꽁한 똥꼬라면 오랫동안 성공할 수 없다. 2) 나는 여기서 짤리더라도 다른데서 충분히 성공할 자신감이 있다.
4. 보스는 나의 리소스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회사 생활을 잘 하는 조언들을 많이 듣곤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말은 ‘매니저를 너의 리소스로 활용하라’ 라는 말이었다. 즉, 매니저는 나의 일을 관리/감독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회사의 테두리안에서 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요소를 해결해주고, 내가 비효율적/비효과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경험과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써, 내가 활용해야 할 리소스(자원)이라는 마인드셋으로 일하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그 뒤로도 회사생활을 계속 하는데 있어서 몇가지 attitude change를 준 것 같다. 첫번째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일하게 되는 것이다. 매니저가 나의 어깨너머로 나의 일을 관리/감독 한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서, 내 일은 내가 리드해서 기획/실행할 뿐이고, 매니저는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가서 이용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생긴다. 두번째는 시니어 매니저들에 대한 울렁증 극복이다. 나 또한 한국사회에서 자라고 군대를 다녀온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는 남자로서, 시니어 매니저일수록 어려워 하는 마인드가 있다. 물론 이런 마인드셋을 완벽하게 버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니어일 수록 나에게 더 득이 되는 리소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큰 생각의 변화인것 같다. 더 시니어일 수록 나에게 더 큰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항상 내가 뭘 하고 싶은지 clear하게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면, 나의 매니저는 나를 도와줄 수 없다. 내가 어떤 분야에서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인지, 그 사람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면 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내가 어떤 성취를 얻을 수 있는 것인지가 명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리소스였던 사람이 자꾸만 자꾸만 다시 감시자이자 평가자로 돌변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5. 뽑기와 내보내기
직장생활에서 상사와 부하직원간에도 처음과 끝이있다. 가장 극단적인 처음과 끝이 바로 사람을 뽑는 과정과 부하직원을 자신의 조직으로부터 내보내는 과정이다. 뽑는 과정은 처음부터 조직 밖에 있는 사람을 입사시켜서 뽑아 오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조직 내부에서 필요하거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자신의 부서로 데려오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반대로 내보내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아예 조직 밖으로 보내는 경우와, 적어도 나의 부서에서는 내보내는 두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사람을 뽑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주로 조직 내에서 사람에 대한 니즈가 존재하고, 일정한 풀(pool)의 지원자 혹은 대상자가 조직 내외에 존재하므로, 이들에 대해서 조사 혹은 인터뷰 등을 통해서 사람을 데려올 수 있다. 물론 ‘좋은 사람’을 뽑아 오는 것은 노동시장에 좋은 지원자가 많이 있는지, 조직 내의 다른 부서에 우리 부서로 옮겨 오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등등 고러햘 요소가 많지만, 결정의 부분에 이르러서는 ‘Like’ or ‘Dislike’의 결정이 이뤄지게 된다. 조직마다 사람을 뽑는 다양한 기준이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이 사람과 일을 하고 싶은가? 라는 궁극적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람을 내보내는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상사가 내가 함께 일하고 싶지 않다고 부하직원을 내보낼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조직의 오너이거나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부서의 일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직원이 있어도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다. 게다가 조직마다 그런 프로세스가 매우 까다로운 곳들이 있을 수도 있고, ‘노조의 동의’와 같이 더 큰 관문이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가장 눈물겨운 경우는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져서 상사가 부하직원을 내보내야 하는 경우다. 사람을 내보내야 한다는 의사결정은 오너나 CEO가 내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 통보는 인사부서 혹은 직접적으로 함께 일하는 상사가 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 오래 되어서 부하직원들에게 사전에 미리 통보를 한 경우를 제외하고, 비교적 갑작스럽게 이런 소식이 전해지는 겨웅에는 부하직원은 어쩔 수 없이 ‘왜 내가 나가야 하는가?’ 혹은 ‘왜 나만 나가야 하는가?’ 등의 생각을 하게된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정의 상태와 분노의 상태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다가 어느새 체념의 상태로 접어들기도 하며, 이 때의 상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하직원이 인간으로써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일깨워주는 일이며, 그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회사가 얼마나 그 직원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했고, 또 대안 마련을 위해서 애썼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동을 했어야만 부하직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서 그 상사는 부하직원에게 평생의 멘토로 남을 수도, 아니면 평생의 원수로 남을 수도 있다.
글 : MBA Blogger
출처 : http://mbablogger.net/?p=5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