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어주는 라디오 속에서 발견한 사자생의 비극

출장차 자동차로 이동하는 도중 우연히 EBS 라디오로 채널을 맞추었더니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독서’에 관한 방송이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신기하다 싶어 계속 듣다보니 EBS 라디오가 올해부터 ‘책 읽는 라디오’로 전면개편을 했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생각났습니다. 하루 11시간씩 독서 관련 방송 편성이라는 전무후무한 방송 편성. 참 놀랍다 싶었습니다. EBS FM 홍보대사로 나섰던 배우 정진영씨가 “‘책 읽어주는 라디오’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던 정말 멋진 일이 생긴 거죠. 독서가 중요하다는 건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했던 말도 공감할 만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한 유명한 중견배우께서 책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인터넷이 보급되고 이른바 다매체 시대로 인해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며 매우 비극적이고 슬픈 일로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더 활자책을 읽는 노력을 기울어여 한다는 주장을 하는 공익캠페인을 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하하 참… 하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 라면서 말입니다. 왜냐구요? 바로 사자생의 비극이 지금 이 시대에 펼쳐지고 있음을 마음 깊이 실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를 좀 펼쳐 놓겠습니다.
 
사자생에 대한 찬미

때는 활자가 탄생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1492년, 르네상스의 문화와 과학 혁명이 한창이던 무렵입니다. 우리는 쉬폰하임이라는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는 논문 <<사자생에 대한 찬미>>를 열심히 쓰고 있었습니다. 사자생은 Manu(손) + Script(쓰다)의 의미, 즉 손으로 사본을 쓰는 사람을 뜻합니다.  중세에 있어 사본(copy document)의 생산은 주로 서사나 성서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본을 쓰는 작업은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이루어졌고 이곳의 사서실에서 신부나 수도사들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생이란 보통 성직자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사자생은 성스러운 존재로 취급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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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futureperfectpublishing.com/2007/08/08/239/
수도원장 요하네스는 반세기 전부터 본격 시작된 활판 인쇄가 굉장히 못마땅했습니다. 비롯 책이라는 것은 성스러운 의식을 가진 사자생과 같은 이들에 의해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기록되어야 하거늘, 활판인쇄를 통한 대량인쇄가 되어버리는 세상을 맞이하면서 그 소중한 가치들이 일순간에 허물어져 내리는 것을 보아야만 했으니까요. 사자생의 노력이 그저 시간낭비인 것처럼 느껴져 버리게 만드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라도 하자, 그래서 그는 사자생에 대한 찬미 라는 논문을 씁니다.

논문의 내용은 ‘필기’란 것의 전통을 열정적으로 옹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실한 수도승은 글씨를 쓰면서 네 가지 혜택을 얻는다.
소중한 시간이 유익하게 사용된다는 점,
글씨를 쓰면서 이해력이 높아진다는 점,
마음속에 신앙의 불꽃이 환하게 피어 오른다는 점,
그리고 내세에 특별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수도원장의 입장에서 그는 사자생의 가치를 지켜주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었습니다. 수도원장은 이 논문을 ‘활판인쇄’를 통해서 세상에 알렸던 것입니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입니까. 필기의 가치와 사자생의 가치를 드높이려던 수도원장의 노력은 도리어 사자생을 욕되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니 식견과 지혜가 출중하셨을 수도원장이 어떻게 이런 황당한 행동을 한 것일까요? 여러분도 이해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누구보다도 사자생의 가치를 지켜주고자 했던 분이 손이 아니라 활판 인쇄를 선택하다니요.

뉴욕대 클레이 셔키 교수는 이를 두고 새로운 매체가 사람들의 삶에 자리잡기 시작하면 그 전에 가치를 지니던 많은 것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빛을 잃어간다고 주장합니다. 무슨 말이냐? 이미 정보의 생산과 유통은 활판인쇄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할 만큼 시장을 압도해 버린 상황이었던 것이죠. 지금 우리 모두의 손안에는 휴대폰이 쥐어져 있습니다. 휴대폰이 없다는 것은 무슨 특별한 사정이 있다고 믿을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스마트폰이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가 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집에 오면 PC를 켜던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 불과 몇년전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여러가지 형태로 ‘종이책’의 소중함을 지키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중함을 어떻게 알리고 있습니까? 라디오로, TV로서, 그리고 PC와 모바일로서… 궁극에는 MP3나 동영상 파일, 또는 스트리밍이라는 디지털이라는 형태로서 알리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수천년, 수백년의 전통은 지금에도 여전히 그대로 전해져 내려옵니다. 우리가 글을 읽고 지혜를 공유하고 전파하는 것은 앞으로의 인류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새로운 도구와 매체에 의해 자연스럽게 대체되어 있는 경우로 변할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주목해야 할 것은 책의 재질이나 형태가 아니라 앞으로도 전해질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구와 매체. 그 변화에 상관없이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서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을 전하며 우주 속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자칫 형식에 집착하다보면 사람들이 나아가고 변화하는 것을 따라잡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자생은 한 때 성스러운 존재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결국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자생 가치의 추락,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활판인쇄술의 발전으로 사라진 하나의 존재로서만 인식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 : 송인혁
출처 : http://everythingisbetweenus.com/wp/?p=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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