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전략’ 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누가 떠오르는가?
- 마이클 포터가 떠올랐다면 당신은 일반인.
- 톰 피터스, 개리 하멜, 오마에 겐이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CK 프라할라드, 김위찬 교수 까지도 떠올랐다면 당신은 진지한 경영학 관심자.
- 빌 베인, 프레드릭 라이히헬드, 크리스 주크, 장세진 같은 사람이 떠올랐다면 당신은 나랑 비슷한 약간은 특이한 취향. ☺
- 피터 드러커 필립 코틀러, 알 리즈, 세스 고딘 등이 떠올랐다면, 당신은 아직 전략이 뭔지 정확히 감이 안오는 사람이다. (참고로 드러커는 전략의 개념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주로 활동한 사람, 나머지는 마케팅 관련된 사람들이다)
위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내 나름의 개인적인 기준이긴 하다.
60년전만 해도 ‘전략’은 없었다.
사실 전략이라는 분야는 60년대에야 처음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70년대 후반 – 80년대 초반 마이클 포터 교수의 논문들과 함께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했으며, 최근에 들어서야 엄청난 호황을 누리는 분야이다. 불과 60년 전으로만 시계를 돌려도 대부분의 경영학 책에는 ‘전략(strategy)’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급격하게 성장한 ‘전략’ 분야의 현재의 위상에 위에서 나열한 교수님들 이외에도 수 많은 숨겨진 실무자들의 공로가 있다. 월터 키엘 3세의 2010년 작 “전략의 제왕(The Lords of Strategy)”이라는 책에는 현대 경영학에 있어서 전략 분야의 발전과정에 전략 컨설팅 회사들의 컨설턴트들이 공헌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지금의 전략 분야를 정립하다시피 한 사람은 브루스 핸더슨 이라는 사람이다. 너무나 낯선 이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마도 그가 만든 회사의 이름은 친숙한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BCG(Boston Consulting Group, 보스턴 컨설팅 그룹)이다.
위에서 언급한 ‘전략의 제왕’이라는 책에 따르면, 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많은 기업들이 자신의 기업과 다른 기업들의 비용 구조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즉, 우리가 생산하는 것과 비슷한 비용에 우리의 경쟁자들도 제품을 생산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가정은 당시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업마다의 비용구조는 조금씩 다르다. 브루스 핸더슨은 처음으로 ‘경험곡선(Experience Curve)’라는 것을 소개함으로써, 당시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비용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깼다. 즉, 기업들이 한 산업에서 오랫동안 제품을 생산하면 경험이 축적되거나 비용상의 효율 개선을 통해서 장기적으로 생산비용이 절감되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 개념은 지금에 와서는 매우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60년대 초반만 해도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경험곡선을 소개함으로써 BCG는 60년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BCG는 우리가 흔히 잘 아는 BCG 매트릭스 등의 다양한 경영 프레임을 소개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잠자던 사자, 맥킨지
BCG의 성공과 함께 많은 기업들이 “전략”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 기업의 비용구조가 남들과 다르고, 우리 기업의 여러가지 사업부 중에서 어떤 분야에 집중을 하고, 어떤 분야는 매각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개념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BCG와의 관계를 잘 활용함으로써 경쟁사 대비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이는 기업들도 늘게 되었다.
동시에 BCG의 성공은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사자인 맥킨지 앤 컴퍼니(McKinsey & Co.)를 잠깨우게 된다.
사실 맥킨지는 BCG보다도 훨씬 이전에 설립이 되었지만, 전략분야에 대해서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제임스 맥킨지라는 사람 자체가 시카고의 회계사 출신이었고, 전략보다는 회계적인 내용에 집중한 분석위주의 컨설팅을 전개하고 있었다. 또한 30년대에는 맥킨지의 일부가 A.T. Kearney 로 분사하기도 하였고, 당시 뉴욕 오피스를 이끌던 마빈 바우어라는 전설적인 컨설턴트가 뉴욕 오피스와 ‘맥킨지’라는 브랜드의 사용권을 갖게 되는 등, 중간에 내분을 겪기도 하였다. 마빈 바우어는 1990년대까지도 맥킨지의 가장 중추적인 인물로 활약하였고, 지금의 맥킨지의 모습을 만든 사람으로 평가 받기도 한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서 BCG의 브루스 핸더슨이 개척한 전략의 붐에 힘입어 잠들어 있던 거인 맥킨지도 전략에 뛰어들게 되었고, 80-90년대를 거치면서 BCG의 1.5배-2배 가량의 높은 매출을 올리는 전략 컨설팅 업계 1위 기업으로 태어나게 된다. 당시 맥킨지를 이끌던 파트너는 프레드 글룩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70년대 후반 – 80년대 초반까지 맥킨지의 성장을 이끈 인물로 손꼽힌다. 그 외에도 앞서 언급한 오마에 겐이치 등도 당시의 맥킨지를 이끌어 온 인물이었고, 다양한 백그라운드의 컨설턴트 그룹들이 맥킨지 특유의 자유로운 토론 문화와 실험정신에 잘 녹아 들어가면서, 맥킨지에서는 수많은 전략이론과 혁신을 리드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맥킨지 출신 중에 유명한 전략가로는 ‘초우량 기업의 조건(In search of excellence)’ 와 같은 베스트 셀러를 쓴 톰 피터스 등을 꼽을 수 있다.
The Bain Way
BCG, 맥킨지와 함께 세계 3대 전략 컨설팅 회사로 손꼽히는 베인 앤드 컴퍼니(Bain & Company)의 탄생은 좀 더 흥미롭다.
학구적인 성격을 가졌던 브루스 핸더슨은 BCG 내부에서 레드, 블루, 그린의 세 팀을 만들어서 상호 경쟁을 시켰는데, 그 중에서 유독 블루 팀이 항상 다른 팀을 압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블루 팀의 리더가 바로 빌 베인이며, 그가 BCG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회사를 차린것이 바로 베인앤컴퍼니이다. 브루스 핸더슨의 BCG 내부적인 실험이 결국 가장 큰 경쟁자가 되고 만 베인앤드컴퍼니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베인은 기존의 BCG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Bain Way를 고집했는데, 그것은 컨설팅이 단순히 전략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고객사에게 실질적인 결과(results)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BCG가 5-10주 정도의 프로젝트를 끝내고 고객사를 떠나는 것과는 달리 베인앤컴퍼니는 길게는 약 2년까지 고객사와 함께 머물면서 그 고객사에게 가시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함께 했다. 그리고 한 산업에서 두가지 이상의 고객사를 서브하지 않고, 한 고객사에게만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렇게 고객과의 관계를 중시한 베인앤컴퍼니는 한 때 BCG를 능가할 정도로 성공을 달렸으며, 베인의 클라이언트들은 굉장히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베인은 훨씬 더 결과(result)에 중심을 두었으며, 자신들의 고객사의 주가가 평균적으로 주식시장의 주가를 훨씬 상회한다는 자료를 통해서 이런 부분을 더욱 홍보하게 된다.
컨설팅의 접근방법으로 기업들의 영업이익을 올리고, 기업을 턴어라운드 시키는데 자신감을 보였던 많은 베인 컨설턴트들은 좀 더 과감한 시도를 하기로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70년대 후반- 80년대의 미국의 기업 자본주의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당시에는 “기업의 퍼포먼스 = 주가” 이며, “기업의 주인 = 주주” 라는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시기였다. 하지만 컨설턴트들은 아무리 고객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고객사의 주가가 올라도 그것이 자신들의 월급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물론 컨설턴트들은 좋은 MBA 출신에, 섭섭치 않은 월급을 받고는 있었지만, 고객들이 몇배의 주식 대박을 터뜨리는 것을 보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80년대 초반에는 이러한 배경에서 베인 캐피탈이 탄생했다.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사모펀드(Private Equity)의 개념을 도입하여, 베인 컨설턴트들이 사모펀드를 만들어서 직접 기업을 사서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등장했던 밋 롬니(Mitt Romney)가 베인 캐피탈(Bain Capital)의 수장이 되었고, 그는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서 베인은 한번의 위기를 겪게 된다. 문제는 엄청나게 늘어난 부채였는데, 당시 베인 캐피털의 CEO였던 밋 롬니는 잠시 베인앤드컴퍼니의 수장으로 와서 이를 완벽하게 해결하게 된다. 채권자들에게 가서 빚을 탕감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도대체 이런 딜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밋 롬니는 ‘턴어라운드의 마술사’라는 말에 어울리게 이 일을 멋지게 해결하고, 베인은 위기를 잘 극복하고 다시 전략 컨설팅의 3강 경쟁구도에 진입하게 된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말하는 Big 3 consulting, 즉 세계 3대 컨설팅인 BCG, 베인, 맥킨지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3대 컨설팅 회사들은 70년대 후반 – 80년대 초반에 이미 전략 분야에 대한 탄탄한 이론적, 실무적 기반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전략의 진화
컨설팅 회사들의 전략 이론들은 체계적이긴 했지만, 실무기반으로 학문적인 기반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략의 학문적 기반을 제대로 닦기 시작한 것은 80년대의 “마이클 포터” 교수였다. 사실 마이클 포터는 ‘산업조직론(Industrial Organization)’이라는 경제학의 세부 분야의 교수이지만, 전략 분야를 정립시켰고, 또 보급시켰다.
마이클 포터는 Harvard Business School (HBS)와 Harvard Business Review (HBR)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신의 수업과 논문을 통해서 수 많은 전략가들을 배출해 냈다. 그리고 HBS와 같은 전미국에 있는 top MBA 를 졸업한 졸업생들은 Big 3 전략 컨설팅 회사에 들어가서 수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리고 또 이러한 big 3 consulting 회사를 비롯한 수 많은 컨설팅 회사들은 또 다시 MBA에 많은 직원들을 보내고 학비를 스폰서 해줌으로써 MBA와 컨설팅은 공생관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물론 그 실무 및 학계의 중심에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이 있다. 다른 MBA 들도 물론 나름의 역할을 하지만, 마이클 포터로 대변되는 하버드 MBA의 전략에서의 위상은 더 없이 공고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로는 미국 전역의 여러 학교들을 중심으로 전략이 단순하게 기업을 “행위의 집합”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서 산업의 수익성과 성장성에 대해서 연구하는 분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과정들을 모두 거쳐서 ‘성공하는 기업들의 7가지 습관(Built to Last)’, ‘Good to Great’ 등을 쓴 짐 콜린즈(Jim Collins), ‘블루오션 전략(Blue Ocean Strategy)’을 쓴 김위찬 교수, 핵심역량(core competency) 에 대해서 역설한 CK 프라할라드, 개리 하멜 전략 등 수 많은 전략가들이 80-90년대에 걸쳐서 배출되었고, 지금과 같은 전략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90년대에는 전략은 기업을 단순히 행위의 지밥이 아니라 “자원(resource & capabilities)”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정을 거쳐 ‘역량(competency)’을 강조하는 트랜드를 겪기도 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핵심 역량’ 같은 단어들은 아마도 회사 생활을 하면서 한두번쯤 들어 보셨을 것이다. 단순히 우리 회사가 하는 비즈니스의 영역이나 행위, 자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마도 90년대와 2000년대를 관통한 전략의 주요 트랜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컨대 애플은 디자인과 혁신, 삼성은 관리와 발빠른 모방, 디즈니는 상상력과 모험과 같이 그 기업만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역량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전략의 트랜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전략에 ‘인간적인 측면’을 가미한 부분이 갈 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80년대 유행하였던 주주자본주의, 즉 주가가 회사의 퍼포먼스를 대변하는 것이고, 회사의 주인은 곧 주주라는 사고방식만으로는 많은 문제가 초래될 뿐 아니라,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도 추구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보급되면서, 이제는 기업의 전략에 ‘사람냄새’ 나는 무언가를 집어 넣기 위해서 전 세계의 전략가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다.
컨설턴트 최후의 커리어는?
전략이 이렇게 보급되고, 우리 주변 곳곳에 퍼지면서 동시에 MBA출신, 컨설팅 출신, 혹은 그 두가지 모두 출신의 경영자들도 숫자 또한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와 함께 예전에는 MBA 출신 혹은 컨설팅 출신들에게 주어졌던 마켓에서의 프리미엄도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 초반만 해도 MBA를 다녀와서 컨설팅 3-5년 정도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그 희소성을 인정받던 시기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기회들은 줄어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수많은 MBA, 컨설턴트 출신의 경영자들이 기업으로 흘러들어가면서 기업 내부의 전략에 대한 역량이 강화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컨설팅업체에게 주던 막대한 비용에 대해서 조직 내부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게 되었고, in-house consulting 이라는 이름으로 조직 내부에 컨설팅 역량을 갖추는 트랜드도 나타나게 된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3대 전략 컨설팅 회사에서 수행하는 프로젝트 중에서 순수하게 전략에 관련된 프로젝트는 20-30% 수준이라고 한다.
하지만 미국에 비해서 아직 컨설팅과 MBA의 역사가 길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발달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컨설턴트 출신의 “턴어라운드 전문가”이다. 컨설턴트는 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에 들어가서 문제해결(problem solving)과 관련하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이러한 트랙 레코드를 가지고 있는 컨설턴트들이 기업의 ‘턴어라운드 전문가’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베인 출신이자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던 밋 롬니, 그리고 맥킨지 출신의 컨설턴트이자, IBM의 CEO로서 90년대 위기를 극복한 루 거스너이다. 밋 롬니는 수많은 베인 캐피털의 수장으로서 그가 인수한 많은 기업들을 턴어라운드 시켰고, 적자 위기에 처했던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을 흑자전환하는 등의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루 거스너는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 (who says elephant can’t dance)’ 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데, 이 책을 통해서 IBM의 턴어라운드 과정을 살짝 엿볼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밋 롬니나 루 거스너 이외에도 수많은 전략 컨설턴트 출신의 CEO들이 많은 기업에서 턴어라운드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대표적인 사례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내 예상에는 10년 이내에 이러한 턴어라운드 전문가들이 많이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수 많은 “전략의 제왕들”이 탄생할 그 날을 기다려본다.
글 : MBA Blogger
출처 : http://mbablogger.net/?p=5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