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글 “10-foot UI의 오해: 가독성이 아니라 몰입형 소비 경험의 문제“에서 PC와 TV 인터페이스의 차이를 생산성과 소비성으로 설명하면서, TV 인터페이스의 핵심은 몰입형 소비 경험이라는 소견을 밝혔습니다. 또 다른 저의 글 “포스트-PC 시대의 의미“에서는 PC와 포스트-PC를 생산성과 소비성의 시장 분할로 설명해 드렸었죠. 그 생산성과 소비성에 대해, 인터페이스적인 측면에서 다시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탈 PC의 새로운 소비성[consumptivity]시대
우선 소비성이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변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생산성[productivity]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특히 비즈니스의 세계에선 정말 중요한 말이죠. 하지만 그 반대 개념인 ‘소비성’이란 말은 그리 잘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영어에서도 ‘consumptivity’라는 단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네요.) 사용이 되더라도 낭비라는 뉘앙스가 들어간 조금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주로 사용을 하죠. 하지만 생산성이 중요한 건 바로 소비성 때문입니다. 소비가 미덕이란 말도 있죠. 소비되지 않으면 생산도 필요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디지털 시대가 바로 이 소비성을 다시 주목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목하는 소비성의 주력 상품은, 다름 아닌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엔터테인먼트가 왜 새삼스럽게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느냐, 언제는 엔터테인먼트가 주목을 받지 않았던 적이 있더냐,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소비성의 시대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포스트-PC의 개념과 더불어 말입니다.
포스트-PC 시대의 의미는 컴퓨팅 도구가 생산성의 시대에서 소비성의 시대로 중심 이동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PC 중심의 디바이스 한계를 벗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결정적 전기는 주지하다시피 스티브 잡스의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가 만들었습니다. 사실 소비성 컴퓨팅의 역사는 퍼스널 컴퓨터의 역사와 같습니다. 퍼스널 컴퓨터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던 애플II의 추억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면 이해가 될 겁니다. 어린 소년들에게 퍼스널 컴퓨터는 게임기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그 시절 초인기 게임이었던 가라데카(Karateka)의 새 버전이 최근 iOS용으로 출시되었더군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물론 비지캘크(VisiCalc)나 IBM PC가 생산성 도구로서의 퍼스널 컴퓨터 시장을 더욱 폭발적으로 이끌게 되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 PC 중심의 소비성 컴퓨팅에서 탈 PC의 새로운 소비성 컴퓨팅이 시작된 것입니다. 탈 PC 소비성 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새로운 폼팩터, 그리고 새로운 인터페이스의 등장에 당위성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생산성은 넓은 작업 공간과 정확한 인터페이스가 관건
인터페이스 측면에서 생산성과 소비성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생산성에는 작업 공간의 중요성이 큽니다. 제가 전부터 얘기했던 몰입의 시청각이라는 게 무의미하죠. 사실 고개 돌리기가 아프지 않고 시력이 미치는 한, 스크린의 크기는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PC에서 멀티 모니터의 수요는 상당히 있죠. 멀티 태스킹, 멀티 윈도가 필요하고, 그래픽 작업 같은 경우엔 픽셀 하나하나가 중요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정확하고 정교한 인터페이스가 중요합니다. 키보드와 마우스가 바로 대표적인 생산성 도구입니다. 일할 때, 키보드의 키감이나 마우스의 성능에 굉장히 민감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작업에 애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성 도구로서의 아이패드의 부족함은 대부분 이런 정교한 인터페이스의 부족에서 나옵니다. 버츄얼 키보드로 장기간 타이핑을 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럽죠. 그래서 컴팩트형 물리적 키보드 액세서리가 많이 나옵니다만, 경험상 풀사이즈의 애플 키보드를 붙이지 않는 한, 인내심이 달포를 넘긴 제품은 없었습니다.
터치 인터페이스는 정말 정교한 작업에 부적합합니다. 물론 터치 인터페이스로도 정밀한 작업을 가능케 하는 아이디어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택틸리스(Tactilis)라는 앱을 보고도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고요, 옴니그래플(OmniGraffle) 앱은 제가 아이패드에서도 즐겨 쓰는 다이어그램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론 터치는 제한적인 인터페이스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창조적 인터페이스로서 펜 입력에 대한 중요성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요즘 삼성에서 S-펜을 기반으로 하는 갤럭시 노트 시리즈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태블릿을 정말 펜 입력으로 생산성 도구로 만들 수 있느냐에는 아직 의문이 있죠. 그건 아래에 포스트-PC의 카테고리와 연결해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죠.
소비성은 전반적인 경험과 방해받지 않는 몰입이 중요
반면, 소비성은 종합적인 경험과 느낌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몰입을 방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크린의 크기가 너무 크거나 작으면 안 되고 몰입이 될 수 있는 딱 적당한 크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소비성의 인터페이스는 어때야 할까요? 제 생각엔 소비성의 인터페이스는 “최소화”가 답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방해받지 않는 몰입의 경험이 최우선이며, 인터페이스는 그것을 방해하지 않는 최소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소비성 인터페이스라 할 수 있는 TV 리모트를 보시죠. 채널 재핑이 조작의 90% 이상(근거 없는 수치)인데, 그것도 소비 시간을 고려했을 때 발생하는 비율이 아주 낮죠.
터치 인터페이스도 보시죠. 터치 인터페이스는 직관적이고 직접적입니다. 직접적이라는 건 관념의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우스의 스크롤 동작을 보면 두 가지 방식이 있죠. 하나는 윈도 시스템에서 전통적으로 쓰이는 휠 방식으로, 휠을 내리면 스크롤이 올라갑니다. 마치 휠의 바퀴에 스크롤 바의 도르래가 연결된 것 같은 기계적 장치의 관념이 존재합니다. 애플 터치패드의 방식은 정반대입니다. 패드와 화면이 하나로 연결된 종이 같은 관념이 존재하죠. 고로 패드를 밑으로 당기면 종이가 따라 당겨져 내려오듯 스크롤이 내려옵니다. 물론 둘 다 몇 번만 해보면 금방 그 가상적 관념은 곧 물리적 관념으로 중첩되고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그런 가상 관념 체계는 다른 인터페이스를 오갈 때면 불편합니다. 휠 마우스를 쓰다가 애플 터치패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첫 불평이 그런 것이죠.
인터페이스가 직관적이고 관념의 학습이 필요없는 직접적인 경험이라는 것은 소비성 인터페이스에 적합한 방식입니다. 어색함이나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끊김 없는 경험의 연속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 감상에 몰입하고 있다가 다른 컨텐트로 이동을 하려는데, 키보드의 자판을 찾아 두들겨야 한다든가 마우스를 잡고 포인터를 옮겨야 한다든가 하는 작업보다는 직관적인 터치 인터페이스가 단절감을 더 줄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경험적 단절성이나 조작의 필요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소비성 인터페이스의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몰입할 수 있는 스크린의 환경입니다. 스크린의 사이즈, 적당한 해상도, 최대한 편안한 사용 자세, 이런 것들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죠.
게임은 생산적 소비성
게임에 관한 얘기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게임은 소비성의 엔터테인먼트 영역입니다. 하지만 대단히 인터랙티브하고 적극적인 소비 형태입니다. 인터페이스 측면에선 피동적인 TV와 달리 능동적인 조작을 바탕으로 하므로 위에서 말한 소비형 인터페이스하고는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요.
하지만 본질적인 면을 들여다보자면, TV든 게임이든 둘 다 몰입형 엔터테인먼트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게임의 인터페이스는 일견 능동적인 생산성 인터페이스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역시 몰입 소비형 인터페이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비성이라는 것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생산적 소비성, 다른 하나는 소비적 소비성입니다. 무슨 말 장난 같기는 한데, 전자가 게임이고 후자가 TV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TV 시청처럼 별다른 인터랙션 없는 소비는 그야말로 소비적 소비가 되는 것이고, 게임처럼 인터랙션이 중요한 소비는 생산적 소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게임이 어떤 가치를 분명히 생산해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게임은 생산의 형식을 가장한 소비라는 얘깁니다. 게임에선 뭔가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얻기도 하는 생산적인 행동을 하지만 실제로 현실세계에 이뤄지는 것은 없죠. 결과적으론 소비만 한 것인데, 생산의 기분을 가장한 것이니 유사 생산적 소비가 되는 것입니다.
게임의 인터페이스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터페이스의 매 순간 세밀한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게 짧은 교육으로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쉽게 익숙해지기 어려운 마니아 게임도 있음.) 게임 패드 구조의 단순함을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게임도 몰입의 환경이 중요한 소비성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TV 경험은 린백의 소극적 인터페이스고, 게임은 린포워드의 적극적 인터페이스라는 상반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두 경험은 몰입형 소비라는 데 본질적 태생이 같습니다. 다만 게임은 몰입의 형태가 더 자극적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좀 더 자극적인 영화를 볼 때는 저도 모르게 ‘린포워드’ 됩니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그게 목적인 엔터테인먼트인 것이고요.
생산성이냐 소비성이냐, 그것은 포지셔닝의 문제
탈 PC, 포스트-PC의 시대가 PC 중심을 벗어난 새로운 소비성의 시대를 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애플이 주창한 포스트-PC 시대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그 가능성을 충분히 입증해 보이고 있습니다. 음악, 영화, 게임 등의 몰입형 엔터테인먼트 소비가 PC가 아닌 새로운 컴퓨팅 폼팩터의 변형으로 성공적인 포지셔닝을 하고 있습니다.
소비성 컴퓨팅 디바이스로 PC가 큰 역할을 해왔지만,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이 되진 못했습니다. TV나 게임기의 역할이 훨씬 더 컸죠. 하지만 포스트-PC, 즉 탈 PC의 소비성 컴퓨팅 디바이스가 새로운 소비 경험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TV도 게임기도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포스트-PC가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회를 잘 파악하여 포지셔닝을 잘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PC의 인터페이스는 소비성에 맞춰있습니다. 소비성은 경험이 중요합니다. 정확성이나 멀티 윈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트렌드를 정확히 보지 못하면 포지셔닝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PC와 태플릿의 포지셔닝 논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현재 절대 우위인 아이패드의 시장은 생산성의 시장이 아니라 소비성의 시장입니다. 거기에 소비자들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PC 시장과 비교하고 PC 시장의 잠식을 얘기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여전히 PC가 중심이라고 합니다.
현재 시점에서 여러분은 (물론 여유가 된다면) PC와 태블릿 두 가지를 모두 갖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PC 또는 태블릿 하나로 이 모든 것을 하길 원하십니까. 어쩌면 후자가 더 실용적이라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로 모든 것을 다한다. 하지만 거기엔 잉여 자원의 거품과 모든 경우를 다 만족하게 최적화될 수는 없는 인터페이스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이 포스트-PC를 갈라져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 RT 서피스의 멋진 키보드 커버가 불편하다는 얘기가 많이 올라옵니다. 또한 윈도8의 터치 인터페이스는 프로그램 런칭이나 위젯 용도 말고 얼마나 많은 가치를 이 생산성 도구에 부여하고 있나요. 마이크로소프트는 생산성과 소비성의 경계에서 무모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한 도구나 미약한 가치는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픽셀센스(원래의 서피스)에서 보여줬던 ‘내추럴 UI’의 가치가 정말 어디에 있었나를 다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성의 갤럭시 노트도 마찬가지입니다. S-펜 인터페이스는 기존 터치 인터페이스와는 분명 차별성이 있는 포인트입니다. 하지만 그 단말기가 과연 소비성인지 생산성인지 명확한 포지셔닝이 필요합니다. 생산성이라면, 생산성 도구로서 불편함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어설픈 뭔가 모자라지만 어쨌든 쓸 수는 있는 도구가 되어선 결코 대중화될 수 없는 카테고리로 전락하고 소멸할 수 있습니다.
월트 모스버그는 포스트-PC는 기존 PC의 컴포넌트 방식이 아닌 엔드-투-엔드 방식의 모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가 하나의 유기적 제품으로 최적화된 전달 방식을 얘기한 것입니다. 즉, 기존 마이크로소프트가 플랫폼만 강조하고 나머지 컴포넌트들은 시장이 알아서 참여하는 방식이었다면 애플은 모든 컴포넌트를 최적화하여 하나의 잘 짜여진 경험으로 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플이 연 포스트-PC 시대라는 것이죠.
마이크로소프트 윈도폰의 최대 경쟁자는 구글의 안드로이드가 될 것이라는 얘기를 종종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같은 방식의 사업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구글은 넥서스 방식의 레퍼런스 디바이스 모델들을 본격적으로 출시하기 시작한 데 이어, 자회사인 모토롤라와 더불어 ‘X 폰’을 개발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들려옵니다. 포스트-PC의 대응은 그렇게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맞습니다. 물론 사업 정치적인 문제나 기업 문화적인 문제 등 여러 걸림돌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모델의 팜(Palm)이나 림(RIM)이 몰락했거나 몰락하고 있는 사실도 부담스럽긴 할 겁니다. 하지만 결국 결전의 방식은 그래야 할 것입니다.
포스트-PC가 일시적인 유행인지, 향후 새로운 카테고리를 확고히 하며 발전해 갈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PC 중심으로 모든 것을 풀어간다는 것은 일단 한 번 실패를 해봤는데, 대신 포스트-PC라는 개념이 꽤 잘 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용자 경험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개념의 융합에 대한 비기술계의 호응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디바이스든 인터페이스든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쿼드코어, 멀티태스킹, 스프레드시트 같은 PC 시대의 가치를 내세우며 포스트-PC 장사를 한다면 호소력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산성에 포지셔닝한다면 생산성에 절대 부족함이 없는 인터페이스를 갖추어야 하고, 소비성에 포지셔닝한다면 방해 없이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인터페이스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포지셔닝의 실패를 맛볼 것이고, 결국 시장 경쟁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글 : 게몽
출처 : http://bit.ly/W42Ej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