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5일. 공유와 개방의 정신을 전 세계에 전파한 크리에이티브 커몬즈(Creative Commons, 이하 CC)의 10주년 기념 행사가 우리나라에서도 CC Korea의 주관으로 열렸다.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정신과 혁신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운동이자 철학이기 때문에 수십 명의 CC 활동가들의 짧은 강연과 활동에 대한 공유, 콘서트 등 매우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이 되었는데, 이 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우리나라 인터넷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우는 전길남 게이오대 교수와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의 부부토크쇼였다. 사회역시 우리나라에 CC 개념을 처음 도입하신 윤종수 부장판사가 맡아서 글자 그대로 IT와 인터넷 업계 사람들에게는 ‘꿈의 콘서트’였다.
이런 축제의 장에서 전길남 교수가 좌중의 환호에 찬물을 끼얹는 발표를 하였다. 바로 전날인 2012년 12월14일 두바이에서 열린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WCIT) 3차 회의에서 전 세계 144개국 중 89개 국가가 새로운 국제통신규칙(ITR)에 찬성했다는 내용이었고, 거기에는 한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규칙에 찬성한 나라와 찬성하지 않은 나라를 구분해보면, 찬성 국가 대부분은 중국, 러시아 및 중동의 여러 나라와 같은 권위주의 국가이고, 반대하거나 기권한 국가는 미국과 서유럽의 대부분의 국가, 일본을 포함한 시민의 자유를 중시하는 그런 국가들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우리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인터넷 정책, IT 정책을 산업 중심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정부 주도로 의사 결정을 내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이지는 것일까?
많은 글로벌 매체들이 2012년의 IT업계 뉴스를 결산하면서, 애플과 삼성전자의 대결을 주요 이슈로 꼽았다. 그만큼 국내 기업인 삼성전자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올라갔고, 갤럭시 시리즈로 대표되는 스마트폰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나라를 제외한 외국의 전문가들 중 어느 누구도 ‘플랫폼 전쟁’의 시대로 표현되는 IT와 인터넷 산업에 있어서 삼성전자가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최고의 매출을 올리고, 애플의 라이벌로 급부상한 삼성전자에 대해 애플과 구글은 물론이고 아마존이나 페이스북보다도 이런 부분의 리더십이 떨어진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이해하지 못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외국에서 우리나라 기업들에 대해 저평가를 하는 이유는 IT와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과 철학에 대해 삼성전자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사회가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IT와 인터넷을 일종의 산업과 경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있다. 그렇지만, IT와 인터넷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이들이 탄생하였고,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여러 가지 결정을 내렸으며, 이런 변화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문화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1980년대 초 PC(Personal Computer)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PC 시장을 놓고서 자웅을 겨룬 것은 전통의 동부에 자리잡은 컴퓨터 업체들인 IBM, 마이크로컴퓨터(Microcomputer) 등과 서부의 실리콘밸리에 자리잡은 매우 작은 회사들인 애플, 탄뎀(Tandem, HP 출신들이 1974년 설립, 1997년 컴팩에 합병) 등의 신생회사였다. 이들의 대결은 컴퓨터 전쟁(Computer War)이라고까지 불리웠는데, 서부의 작은 다윗들이 동부의 거대한 골리앗을 쓰러뜨리면서, 오늘의 실리콘밸리의 전성기를 시작하게 된다. 이 전쟁에서 서부가 이긴 것은 컴퓨터 아키텍처 디자인(architecture design) 철학의 승리였다고도 한다. 동부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학문인 뉴톤/카르테시안(Newtonian-Cartesian) 철학에 기반을 둔 계층적 논리(Hierarchical Logic System)이었고, 서부의 디자인 철학은 하이데거(Heidegger)의 도구와 인간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철학을 기반으로 하였다. 어떻게 서부에서 동부의 전통적인 서구철학에 반대되는 디자인 철학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60년대 젊은 세대들이 동부의 기존 문화질서에 저항하면서 서부,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한 거리에 모여 히피(Hippie) 문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 중심의 가치관 대신에 동양의 참선과 요가를, 육식대신 채식 등을 하는 등의 기행을 하면서 자유와 대중을 중심에 두고, 권위와 전통을 부정하는 여러가지 운동을 펼친다. 이들도 인생이 있는지라 70년대 말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도 낳게 되고, 교육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는데, 이런 것들이 실리콘밸리의 문화에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과 세계적인 연구소로 알려져 있는 Xerox 의 PARC 같은 연구소들을 끌어간 수많은 연구인력들이 과거에 히피 생활을 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동안 <거의 모든 IT의 역사> 이후의 어떤 책을 후속으로 낼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였다. 몇 가지 생각이 있었고, 내년에 <거의 모든 IT의 역사>에서 부족했던 최근의 변화를 보강하여 2판을 내자고 생각했고, IT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책도 써보자고 생각해서 실제로 집필을 조금 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번 WCIT에서의 결정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현재의 인터넷은 단순한 기술과 기업들의 경쟁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다. 냉전시대의 국가적인 전략과 동부와 서부의 지역적인 차이, 미국의 역사와 철학 및 중요한 문화적인 요인들과 주요 인물들이 인터넷 전반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인터넷은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기본권이고, 사소한 정책 하나 하나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고도성장을 이룩한 우리나라에서 제일 부족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기술에 대한 인문학적인 성찰이다. 이제는 우리도 전 세계를 리드할 수 있는 기회는 왔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단순한 기술과 산업, 제품을 넘어서서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를 이해하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으면서도 전 세계 지구촌 주민들과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철학과 가치를 함께 부여하는 것이다.
이번 연재를 통해 인터넷이 탄생할 수 밖에 없었던 다양한 역사적인 사건과 배경, 그리고 주요 인물들의 생각과과 철학, 그리고 그 발전의 과정과 미래에 대해 조망하고자 한다. 일주일에 한 편 정도 글을 포스팅할 예정인데, 연재 중간에 전체 내용은 책으로 먼저 엮어져서 나올 가능성이 많다. 아마도 지난 번 <거의 모든 IT의 역사>의 연재보다는 조금 어려울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잘 모르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등장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연재를 통해 우리 사회에도 인터넷이 가지고 있는 미래사회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1편에 계속)
글 : 정지훈
출처 : http://health20.kr/2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