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에니악(ENIAC)을 개발한 펜실베니아 대학, 이 밖에도 컴퓨터 개발로 유명한 카네기 멜론 대학이나 일리노이 대학은 모두 동부에 있다. 이렇게 미국 동부가 컴퓨터 개발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대호 주변의 오하이오 주나 미시건 주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공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산업의 근간을 형성한 석유, 철강, 자동차 산업 등이 오대호 주변에서 번성했다.
또한 산업의 인프라를 형성하는 철도, 전력, 전화에 대해서도 동부에 투자가 집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기술적인 난제는 전화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전쟁 당시에는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이 중요하게 생각되었지만, 전통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통신 분야의 중요성이 컸다. 통신산업에도 컴퓨터를 이용한 기술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연구소가 바로 미국의 틍신산업을 주도했던 AT&T의 벨 연구소이다.
트랜지스터에서 싹튼 실리콘 밸리의 씨앗
벨 연구소에서 개발한 트랜지스터는 1947년 세계최초로 개발된 이후 전 세계에 전자제품 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세계 최초의 무선 장거리 통신기술, 세계 최초 TV방송위성인 텔스타도 벨 연구소에서 개발되었다. 그 밖에도 소니가 상용화한 디지털카메라용 반도체인 CCD나 최초의 실용적인 태양전지를 만들어 낸 곳도 벨연구소다.
벨 연구소는 특허공유 등 공동연구의 원칙을 통해 연구소 내에서 생겨난 모든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연구소의 업적을 쌓아나갔고, 이것이 벨 연구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벨 연구소에는 수도 없이 많은 유명한 연구자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주목할 인물로 클로드 섀넌이 있다. 1편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노버트 위너의 제자였던 섀넌은 비트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하였고, 이를 이용한 정보이론을 만든 인물이다. 통신이 전통산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디지털 혁명이 전 세계를 바꿀 것이라는 것을 느꼈던 섀넌은 벨 연구소에 디지털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기술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의 이런 선견지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벨 연구소는 세계 최대의 기업으로 군림하던 AT&T의 강력한 지배력을 이용해서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했지만, 클로드 섀넌이 느꼈던 디지털과 인터넷을 바탕으로 하는 세상 변화의 씨앗을 늦게 감지하였고, 1984년 미국의 반독점법에 의해 AT&T의 강제분할이 되면서 모기업이 흔들리면서 쇠락이 시작된다.
디지털 시대 힘의 이동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한 인물은 바로 벨 연구소와 트랜지스터와 관계가 있다. 트랜지스터는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라는 물리학자가 존 바딘, 월터 하우저 브래튼과 공동발명한 것으로 그는 이들과 함께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36년 MIT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벨 연구소에 합류한 그는 바딘과 브래튼이 1947년 12월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는데 성공하자, 자신의 전기장 효과를 이용한 아이디어까지 각자 특허를 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벨 연구소의 변호사는 쇼클리의 전기장 효과 원리가 1930년에 다른 사람에 의해 특허출원된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내고 특허가 거부될 위험을 회피하고, 바딘과 브래튼의 디자인에만 적용해서 특허를 낸다. 쇼클리는 샌드위치 형태의 트랜지스터 개념을 생각해내고 지속적인 연구를 한 결과 1951년 접합 트랜지스터를 발명하고, 이 발명의 특허권을 가졌다. 쇼클리는 연설과 강의를 잘하는 사람이었고, 미국 정부나 국방부의 고문으로도 활약했기에 대중매체들도 바딘과 브래튼 보다는 쇼클리를 더욱 조명하였다. 이렇게 쇼클리와 바딘과 브래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고, 쇼클리의 독단적인 성격이 벨 연구소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기에 그는 경영진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단지 연구자이자 이론가로서만 평가를 받았다. 이런 벨 연구소의 분위기에 실망한 쇼클리는 1953년 벨 연구소를 떠나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이 때 자신보다 10살 많지만, 대학동창으로 절친했던 아놀드 벡만(Arnold Orville Beckman)이 설립한 벡만 인스트루먼츠(Beckman Instruments)에서도 일자리를 얻었고, 그의 지원으로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Shockley Semiconductor Laboratory)를 설립하였다.
쇼클리는 자신의 명성과 벡만의 자금을 이용해서 벨 연구소에서 일하는 옛 동료들을 자신의 연구소로 데려오려 했으나, 대부분 그의 독선적인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옮기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동부와 서부의 차이는 컸기 때문에, 동부의 우수한 인재들을 서부로 데려오고 싶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쇼클리는 인근 대학을 돌며 뛰어난 졸업생을 찾아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연구는 생각보다 잘 진척되지 않았다. 연구소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괴퍅한 성격을 견딜 수 없어서 결국 연구원 8명이 회사를 그만두고, 페어차일드 카메라 & 인스트루먼트(Fairchild Camera & Instrument)로 적을 옮겨서 페어차일드 반도체(Fairchild Semiconductor)를 설립하게 되는데, 쇼클리는 이들은 배신자들이라고 비난했기에 ‘배신자 8인’이라고도 불렀는데, 서부의 대학 졸업자들이었던 이들이 바로 오늘날의 실리콘 밸리의 시작을 알린다.
‘배신자 8인’에는 나중에 페어차일드를 떠나 인텔을 차린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와 고든 무어(Gordon Moore), 그리고 실리콘 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로 성장하게 되는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를 설립한 유진 클라이너(Eugene Kleiner) 등이 포함되어 있다. 페이처일드 반도체는 인텔 뿐만 아니라 내셔널 세미컨덕터(National Semiconductor)와 어드밴스드 마이크로 디바이시스(Advanced Micro-Devices)도 페어차일드에서 갈라져나온 회사이고, 이런 반도체 회사의 급성장으로 실리콘을 재료로 한 산업이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밸리지역을 번성하게 만들면서 이 지역을 실리콘 밸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다음 편에 계속)
참고자료:
<벨연구소 이야기>, 존 거트너 지음, 정향 옮김, 살림Biz, 2012
Farichild Semiconductor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William Shockley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글 : 정지훈
출처 : http://health20.kr/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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