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다거(喫茶去)’란 말이 있다. 우리나라 말로 옮기자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로 옮길 수 있다. 이 말은 중국의 주조 스님(778~897)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를 찾아 온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깨달음이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대답 대신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라고 답했다. 이를 옆에서 지켜보던 제자가 그렇게 답한 이유가 뭐냐고 묻자, 그 제자에게도 “자네도 그럼 차나 한 잔 하지.”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로 ‘끽다거’란 유명한 선어가 되었다고 한다.
선어의 특징상,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글로서 옮긴다는 게 쉽지 않고, 옮긴다고 하더라도 그 뜻이 온전하지 못하다. 이런 이유로 사람에 따라서 선어를 자신의 상황에 맞춰서 해석하는 경우도 많아, 그 오해가 잦다. 일반인들에겐 상당히 피상적인 도라는 것을, 깨우치지 않는 이상 ‘끽다거’라는 몇 마디로 그 뜻한 바를 완전히 전달할 수 없다.
다만 노승이 그를 찾아와 도를 물은 이들에게 빈부의 차이, 귀천에 관계 없이 “차나 한 잔 하시게.”란 말로 도의 해법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것에서, 무심의 마음을 배울 수 있다. 인간은 선입견의 동물이다.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어떤 환경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따라서 호불호가 명확하다. 이런 이유로 타인과 이야기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배경 모습에 따라서 상대방을 판단하고 그의 이야기를 내 자신의 창으로 판단한다. 흔히 이야기하는 아집에 갇혀 타인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다.
물론 이런 프레임이 정보 과잉 시대에 정보의 취사 선택을 용이하게 하지만, 다원화된 시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통해서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는 상황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프레임에 갇혀서 일처리를 할 경우가 많다.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의 의견은 좋은 의견으로 평가하고 나와 잘 맞지 않는 이들의 의견은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선입관의 문턱을 넘지 못해 폐기처분하는 경우가 무척 많다.
밀턴 프리드먼이 쓴 ‘화폐 경제학’은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여러분, 격렬한 토론에 이끌려 상대방이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가정하는 것은 좋지 않은 습관입니다. 우리는 남의 의도에 대해 관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남의 의도가 선하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순된 논리 또는 터무니없는 추론에 관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악인이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범죄보다 엉터리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이 본의 아니게 저지르는 범죄가 더 컸던 것입니다.”
이 말은, 끽다거처럼 상대를 완전한 무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직장생활에서 많은 오해는 상대방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논리를 편다는 생각에 있다. 끽다거와 같은 무심의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게 최상이지만,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상대방에게 나쁜 의도는 없고 단지 그의 논리의 문제점에 관심을 둔다면, 그나마 교착 상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고로 몇 백 년이 지나 고리타분한 말처럼 들리지만,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에게 선입견 없이 ‘차 한 잔을 건넬 수 있는’ 끽다거의 마음이 아닐까,한다.
* 이 말은 2세기 전에 프랑스 국회의원 피에르 듀퐁이 한 것이다.
글 : 신승환
출처 : http://www.talk-with-hani.com/archives/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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