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판교에서 나와서 외곽순환을 타려면, 엄청난 각오를 해야 한다. 몇 백 미터의 도로를 가는데 30분 정도는 ‘찰라’라 생각해야 한다. 그 찰라의 순간에, 평소 타인을 향한 엄청난 배려심을 보이는 신사라도, 조금의 양보를 허용하지 않는 소인배로 변신할 수 있다. 조금의 틈을 타서 차선을 확보하려면, 굶주린 야수 떼에서 간신히 얻은 고기 조각을 지키려는 원시인처럼 사주경계를 해야 한다. 아차,하는 순간 언제일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상향선 판교 나들목은 ‘X’자로 차들이 크로스하기 때문에, 교통 흐름이 좋을 때 좋을 때대로, 교통 흐름이 최악일 때 최악의 상황대로 어려운 상황이 벌어진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이런 교통대란을 유발한 도로가 왜? 만들어졌는지 궁금했다.
앞에서 링크를 걸은 글에 달린 댓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처음부터 판교IC는 사고 위험이 많은 곳이 아니었다. 외곽순환 도로 생기고 판교IC가 생겼을 때 별 문제가 없었으나, 분당 수지 등의 도시가 생기면서 교통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따라서 여기저기 땜질식으로 도로가 연결되다 보니, 오늘날의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최근에 개선이 많이 되었다고 하나,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이 도로에는 많다.
흔히 고약한 문제라는 게 있다. 피상적으로 보면 해결책이 간단해 보이는데, 사실 해결책이 쉽지 않은 문제가 대표적인 고약한 문제다. 고약한 문제에 대해서 답을 잘못 내놓으면, 그 해답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고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바로 판교IC의 현 상황이 바로 고약한 문제에 해당한다. 초기에 교통이 많아지면서 교통량을 해결하는 문제는 간단했을 것이다. 도로를 상황에 따라서 연결하면 되는 문제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급변화하는 환경은, 초기 해결책을 내놓는 문제정의의 밖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즉 해결책을 잉태한 문제 정의가, 처음엔 올바르게 보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른 게 되어 버렸다.
문제를 정의하는 게 쉬울까? 해결책을 만드는 게 용이할까?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개인적으로 해결책을 만드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좋은 문제 정의란, 단순히 문제 상황을 기술하는 것 이상이다. 문제를 잘 정의하면, 사실 그 속에는 좋은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프레임이 녹아있게 된다. 따라서 좋은 해결책을 찾으려면, 자신이 풀려는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문제 정의가 더 중요하고 해결책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
‘대체 뭐가 문제야?’란 책에서는 문제 정의의 다양한 면을 소개하는 일화가 나오는데, 그중에서 판교IC와 같은 토목공사의 사례가 있다. 제네바 호수 위쪽으로 있는 산맥을 통과하는 긴 터널이 완공되었다. 개통하기 직적 공사를 담당했던 엔지니어는 운전자들에게 전조등을 켜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을 잊었다. 터널의 조명은 잘 되어 있지만 운전자들은 산악에서 흔히 일어나는 만약의 정전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표지판엔 이렇게 썼다.
경고: 터널입니다. 전조등을 켜세요.
경고판은 터널 입구에 세워졌고 공기에 맞춰 터널이 개통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개통 후 생겼다. 터널을 빠져 나간 후 400미터 전방에 멋진 호수가 있었다. 터널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그곳에 차를 세워두고 경치를 관람하거나 생리적 욕구를 해결했다. 그런데 많은 운전자가 터널을 빠져 나오면서 전조등을 끄는 것을 잊어, 그만 배터리가 방전되는 사태가 빈번하게 생겼다.
해결책의 효과성은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우선 멍청한 운전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냥 두는 것도 한 방법이다. 호수 휴게소에 배터리 충전소를 세우거나, 아니면 경제 활성을 위해 배터리 충전 사업을 민간에 위탁하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터널 끝에 전조등을 꺼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친절한 표지를 세우는 방법도 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는 게 옳을까? 섣불리 문제의 해결책을 정의하기 전에,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책에서는 문제 정의의 관점을 몇 가지 소개하는데, 이 문제는 ‘누구의 문제’냐는 관점으로 문제를 정의했다. 터널을 설계한 엔지니어의 책임, 아니면 돈을 벌 수 있는 배터리 사업자의 문제, 아니면 멋진 경관을 만든 자연?, 운전자의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운전자.
누구의 문제냐에 따라서 해결책이 달라진다. 책에서는 전조등을 끄지 않고 달린 운전자의 문제로 정의했다. 따라서 운전자가 전조등을 끌 수 있는 최소한의 힌트를 제공하는 것으로 문제 해결을 결론 지었다. 그렇다면 전조등을 켠 운전자에게 힌트를 어떻게 주었을까? 터널 끝에 이런 표지판을 세웠다.
“전조등이 켜 있습니까?”
책에서는 운전자의 문제로 정의하면서 간단한 표지판을 세우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만약에 이런 문제 상황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못된 자본가의 문제라 한다면, 표지판을 세우지 말고 휴게소에 배터리 충전 사업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간단한 표지판을 세우는 문제에서 자본가의 잘못된 욕심과 자본가에 넘어간 부조리한 공무원이 엮인 ‘고약한 문제’로 변질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자동차 회사에서, 자신들의 문제로 인지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조도센서를 차량에 장착해서 낮이라도 터널에 들어가서 어두워진다면 전조등을 켜고, 터널을 빠져 나왔을 때 전조등을 자동으로 끄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부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시스템은 이미 자동차에 장착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TV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제정의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겠다. TV의 헤게모니를 점령하려고 애플, 구글, 삼성을 포함한 제조사는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IT혁명으로 다양한 해결책이 나왔지만, 그 가운데 딱 이거라는 해결책은 없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난 이 문제를 조금 더 본질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현재 TV에는 우리가 문제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 만약 그런 문제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문제는 소비자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비용 편익 분석에 기반해서 자신들의 지갑을 열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살만한 정도의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재 다양하게 소개되는 TV에 대한 해결책은, 누구의 문제 어떤 문제에 기인한 해결책일까?
아이폰이 모바일 패러다임을 한번에 바꿀 수 있었던 건, 누군가는 짜집기 기술이란 폄훼하지만, 그 당시 막연하게라도 느끼던 모바일 환경의 문제를 명확하게 진단하고 그에 대한 만족할만한 해결책을 내놓은 데 있다. 자, 그렇다면 TV에는 과연 일반 소비자가 아이폰에서 느꼈던 그런 보편 타당하게 문제가 있을까? 사실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최소한 내가 인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현재 나오는 TV에 대한 해결책들이 정의한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문제 정의가 명확해도 해결책을 얻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정의에 대한 시도가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점. 이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 책이 90년에 출판되어서, 당시에 이런 사양은 보편적으로 자동차에 장착되지 않았다.
글 : 신승환
출처 : http://www.talk-with-hani.com/archives/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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