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해서 우선, LA에 있는 사촌집에서 트럭을 빌리고, 내가 일하게 될 Menlo Park에 집을 구했다. 나이가 좀 있는 학교선생님과 엔지니어가 동거하고 있는 집에 방을 하나 얻어서 지내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부부가 아니고 동거라서 당황했지만 이게 문화 차이인가보다 하고 받아들였다.
집을 구하고 나서 드디어 SK Telecom Ventures에 출근을 했다. 아직도 출근 첫날의 설레임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일했던 SK Telecom Ventures는 Sand Hill Road에 위치해 있었는데, Sand Hill Road는 여러 책이나 영화에 등장할 정도로 많은 벤처캐피탈이 위치한 유명한 장소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길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출근을 했다.
SK Telecom Ventures에 도착해서, 먼저 Patrick과 인사를 하고 다른 동료들과도 인사를 했다. 처음엔 다들 워낙 영어로 빨리 말을 해서 다 알아 듣지는 못하고, 모든 것이 처음보는 광경이라 그저 신기해서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그런데 Patrick이 갑자기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면서 미팅룸으로 날 데려갔고, 출근 첫날부터 스타트업이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어색하게 스타트업 사람들이랑 인사를 하고 앉아서 발표를 듣는데 솔직히 거의 못 알아 들었다. 비록 많이 알아 듣지는 못했지만, 그 발표는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열정적으로 발표하는 스타트업의 모습도 멋져보였고, 열정적으로 질의응답을 하는 우리 회사 사람들도 멋져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IT 관련 용어를 전혀 몰랐을 뿐만 아니라, 벤처캐피탈과 관련된 용어도 거의 몰랐기 때문에 그날 발표는 한글로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잘 알아듣지 못했을 것 같다. 하아.. 미리 공부를 좀 하고 왔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을 어쩌겠는가. 그래서 첫날부터 모르는 단어들을 적어 놓고 찾아보는 생활을 반복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단어가 있을 경우에는 Patrick 한테 물어봤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Series A”라는 단어의 뜻을 못 찾아서 애를 먹었던 것이다. 벤처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단어이지만, 그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정확한 뜻을 찾기가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Series A”란 스타트업이 벤처캐피탈과 같은 기관에서 처음 투자받을 때를 일컫는 말이고(보통 10-30억), “Series B”란 두번째로 투자받을 때를 일컫는 말이었다. Patrick한테 단어의 뜻을 물어봤더니 친절하게 Seed, Angel, Bridge, Series A, B, C 등 투자 라운드에 대한 기본적인 용어 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렇게 모르는 단어를 하나 둘씩 알아가다 보니 점점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알아듣는 단어들도 늘어나고 감도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Patrick이 갈 곳이 있다면서 날 어디론가 데려갔다. 가는 동안 나에게 Patrick은 Y-combinator가 뭔지 아냐고 물었고 나는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서 Y-combinator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유명한 벤처 인큐베이터(사실 인큐베이터가 뭔지도 정확히 뭔지 그때는 몰랐다)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 날은 Y-combinator 의 09 여름 출신들이 Demo Day를 갖는 날이었고, 실리콘 벨리의 많은 투자자들이 그 기업들의 발표를 보기 위해서 참석하는 날이었다.
행사장에 도착하자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Patrick이 Y-combinator를 만든사람을 소개해줘서 인사를 했다. 그렇다. 바로 그 유명한 폴 그레이엄이었다. 하아..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다니. 좀 더 나에대해서 각인을 시켜놨어야했는데, Y-combinator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짧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 나중에 Y-combinator와 폴 그레이엄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 이후에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지나간 일을. 언젠가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Patrick은 나에게 각각의 회사에 대해서 1-5점으로 점수를 매겨보라고 했고, 총 15개 회사정도의 발표를 들었는데 그 때 가장 높게 점수를 줬던 회사는 Dailybooth(사진 중심의 트위터 같은 서비스였는데 Airbnb에 12년도에 인수되었다.)와 Bump Techonology(우리 나라에서도 한동안 유행했던 Bump는 두 기기를 부딪히면 연락처나 다른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회사인데, 초창기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잘 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였는데,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우리회사에서도 발표하는 많은 스타트업을 봤지만, 이렇게 한자리에서 많은 스타트업들과 여러 투자자들을 볼 수 있는 DemoDay는 여러가지로 신선한 자극이었다. DemoDay에 참석하고 나니 내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곳에 있는 동안 더 많은 경험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매주 꾸준히 1~2개씩 스타트업 발표에 참석하다보니, 2달 정도가 지나자 스타트업이 발표할 때 참석하면, 대충 우리회사가 투자에 관심이 있을만한지 아닌지 판단이 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회사가 전혀 투자할 것 같지 않은 아이템을 가진 스타트업이 발표를 하는데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Patrick과 다른 동료들이 너무(?) 열심히 질의 응답을 하는것이 아닌가? 물론, 스타트업도 상당히 열정적으로 질문에 대해 답했다. 그 모습이 뭔가 의아했던 나는 미팅이 끝나고 나서 Patrick에게 물었다.
“Patrick, 저 회사에 투자할 생각 있어요?”
“하하 아마 안할 것 같은데?”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듣고 질문했어요? 시간낭비 아니에요?”
“태우,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귀중한 시간을 내서 발표하러 왔는데, 내가 비록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그 시간 동안 최대한 열심히 질문하고 대화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아까 그 사람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너도 봤잖아?”
그 순간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인생을 걸고 한다라. 나는 인생을 걸고 해본 것이 있던가?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던 사실이 너무나도 멋지게 느껴졌고 가슴한켠에서 두근거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언젠가 인생을 걸고 스타트업을 한다면 하루하루 저렇게 열정적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p.s. 지금와서 느끼는 거지만, Patrick은 정말 훌륭한 마인드를 가진 벤처캐피탈리스트였고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건 정말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만약 돈만 생각하는 벤처캐피탈리스트와 일했더라면, 나는 스타트업의 매력에 빠지지 못했을 것이다.
글 : 김태우
출처 : http://goo.gl/J8Ux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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