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포스트: ‘청중’이 ‘나’를 정의한다>
검색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Steven Levy, In the Plex, Simon & Schuster, 2011]. 우리는 스스로를 기꺼이 공개한다. 페이스북, 트위터, 링크드인, 블로그를 통해 친구는 누구이고 직업은 무엇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먹고 마시는지도 공개한다. 사회적으로 존재하고 싶은 나는 더 많이 보여지기(visibility)를 그래서 존재하기를 원한다. 반면 이로 인해 SNS에서 피로도를 호소하는 사람은 늘어나고 더욱 프라이버시를 외치고 있다. 진퇴양난이다.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이번 포스트의 주제는 투명성(transparency)이다. 투명성의 문제를 첫째 추적 가능성(traceability), 둘째 가시성(visibility), 세째 프라이버시(privacy) 문제로 나누어 정리할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세상이 왜 투명해질 수밖에 없는지, 투명성이 제기하는 진짜 이슈가 무엇인지 논의될 것이다. 결론에서는 투명성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해법을 공유하도록 하겠다.
모든 것이 추적가능하다 (Traceability)
우리가 인터넷에서 보고 듣고 쓰고 검색하고 구매하는 모든 행동은 고스란히 남는다. 내가 알게 모르게 남기는 디지털 흔적(digital trail)은 어떤 형태로든지 추적가능하고 이를 기반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도 드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투명성이 제기하는 첫번째 이슈, 추적 가능성이다.
이제는 학생이 교과서를 읽고 왔는지도 교수가 정확히 알 수 있다. 최근에 문제가 된 미국 NSA의 프리즘 프로젝트도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FBI는 보석상 강도의 차량이동 경로와 시간이 일치하는 핸드폰의 위치를 추적하여 강도를 검거하였다. 내가 과거에 저지른 사소한 과오까지 모두 기록되고 누구든지 열람가능 하다면 어떤가?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해 새로운 (꾸며진) 콘텐츠를 만들기도 하고 이를 도와주는 서비스도 있다. 이제 공개적으로 심판대에 오르는 대상은 일국의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에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David Brin은 그의 저서에서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것이 추적가능해진 세상에서는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자유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한다[David Brin, The Transparent Society, Addison-Wesley, 1998].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도 페이스북을 통해 보다 열려있고 투명한 세상을 만드는 것을 핵심가치로 삼고 있다[David Kirkpatrick, The Facebook Effect, Simon & Schuster, 2011].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경험하게 될 것 같다. 기술적으로 추적 가능성의 범위는 더욱 넓어질 것이고 막을 수도 없다. 더이상 과거는 잊혀지고 흘러가는 것으로 여길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책임지고 함께 가야 하는 ‘현재의 나’의 일부가 되었다.
보여줄수록 신뢰받는다 (Visibility)
부정적인 데이터가 많이 추적되는 것도 문제겠지만 데이터가 아예 없는 것도 문제다. 아무 SNS에도 가입되있지 않고 기록이 없는 사람은 이상하게 본다. 조직도 예외는 아니다. 검색 결과가 ‘No result’로 나오는 회사는 믿기 어렵다. 개인과 조직은 이제 신뢰받기 위해 최대한 자신을 공개하고 있다. 투명성이 제기하는 두번째 이슈, 가시성이다.
사람들은 존재하기 위해 콘텐츠를 만든다. SNS에서 대부분은 실명을 사용하고 있고 많이 보여줄수록 신뢰도가 높아지는 현상도 존재한다[H. Colleen Stuart, Laura Dabbish, Sara Kiesler, Peter Kinnaird, Ruogu Kang, Social Transparency in Networked Information Exchange: A Framework and Research Question, CSCW, 2012]. 에어비엔비(http://airbnb.com) 등 많은 공유 서비스 (sharing service)에서 소셜미디어는 신뢰지수에 활용되고 있다. 일명 소셜 크레딧이다.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최근에 개설했다면 점수는 엉망일 것이다. 은행 거래를 오늘 시작한 사람의 신용과도 같다. 오랜 기간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준 사람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 여러 서비스에서의 활동을 공개하면 할수록 점수는 높아진다.
가시성은 이제 새로운 존재방식이다.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단순히 내 지인들이 아니라 그들의 친구, 더 나아가 친구의 친구로 연결된 인터넷의 모든 사용자가 될 수 있다.
프라이버시는 없다 (Privacy)
서로 신뢰받기 위해 최대한 공개하지만 그렇다고 사생활을 보호하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시성이 높아질수록, 모든 행동이 추적가능해질수록 프라이버시에 대한 욕구는 커진다. 투명성이 제기하는 세번째 이슈, 프라이버시이다.
지금까지 프라이버시 이슈는 새로운 기술의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이미 이전 포스트에서 정리한 것처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이 사라진 곳에서 누군가 나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줘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이제 모든 종류의 콘텐츠가 스트림으로 섞여 흐른다.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공유하고 구경하면서 정신없이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자라난다. 이것이 오가닉 미디어이다. 더 이상 공간으로 정리정돈 되었던 구획이 없는 것이다. 대신 무한대의 네트워크에 노출된 내가 있다. 세상은 유리처럼 투명해졌고 여기서는 국가든 개인이든 조직이든, 강제적으로 서로의 영역을 지키게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프라이버시는 더 이상 남이 보장해야 하는 내 권리가 아니다. 여기서는 ‘소통’의 방법도 달라지고 상생하는 규칙도 우리가 정할 것이다. 식당에서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것은 칸막이가 아니라 에티켓과 암묵적 약속이다. 프라이버시는 권리(right)에서 참여(participation)로 페이지를 넘겼다.
“Once you realize you live in a glass house, you start thinking differently.” by Harold Jarche
투명성은 새로운 질서이다
투명성은 이제 새로운 질서가 되었다.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방법밖에는 없다. 더 부지런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고 서로 신상을 털자는 얘기가 아니다.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존에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가 만들어온 규칙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이를 대신해야 하는 ‘개인’의 역할 범위는 훨씬 커졌다. 내 정체성이 카오스가 되지 않으려면 나 스스로가 정리정돈하고 길을 만들어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1. 고갈되는 투명성
오가닉 미디어에는 두 가지 종류의 투명성이 있다. 하나는 고갈되는 투명성이다. 이 경우는 ‘노출’에 가깝다. 고갈되는 투명성은 말 그대로 보여 주다가 더 보여줄 것이 없을 때 이야기는 끝난다. 연예인의 노출이나 일반인의 사생활 공개나 마찬가지다. 겉과 속이 다른 (가짜) 투명성도 이에 속한다. 권력기관에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다른 것을 드러내는 현상도 같은 범주에 있을 것이다. 이 경우는 언젠가 들통이 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를 안고 가야 한다.
2. 스토리를 만드는 투명성
다른 하나는 스토리를 만드는 투명성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겉과 속이 같은 나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스토리는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다. 사용자의 정체성을 포괄한다. 장황하고 비장한 스토리일 필요는 없다. 다양한 소재가 새로운 발견과 공감으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진정성과 소통에 기반한 개방은 스토리를 진화하게 만든다. 뉴스가 진실공방에 정보의 유출과 노출로 흐른다면 진정한 투명성이 아니다. 반면 ‘가디언’의 오프라인 뉴스카페 실험과 같이 독자를 직접 만나고 뉴스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하게 한다면 다르다.
결국 투명성의 진짜 이슈는 보여주는 데에 있지 않다. 겉과 속이 같은 내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데에 있다. 치열한 체험과 부지런한 도전이 없으면 스토리도 없고 나도 없다. 조직이라고 다를까. 스토리를 만드는 투명성은 노출과 사생활 이슈 이면에 감춰진 ‘반전 스토리’이다.
나는 어떤 스토리를 만들고 있는가?
제대로 된 스토리를 만드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필자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필자가 나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면서 나침반으로 삼는 질문을 독자들과 공유함으로 이 포스트를 마무리 한다.
1.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있는가?
아직도 대기업에 ‘소속’되기를 인생의 목표로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세상은 많이 변했다. 소속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을 만들고 무슨 활동을 하는지 즉 나의 스토리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또는 기업)과 같은 스토리를 만들게 된다면 나는 그들 중 하나일 뿐이다. 오가닉 미디어에서는 누구든지 자신만의 색깔을 가질 수 있다.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 잘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삶을 살아간다면) 나만의 스토리를 쌓을 수 있다.
2. 겉과 속이 같은 스토리를 만들고 있는가?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이를 기반으로 청중을 만들어 간다. 소셜미디어는 나의 가시성(visibility)을 높여 누구나 연예인이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 따라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줌으로써 사적인 영역을 최대한 지키려고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두 개의 나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나의 평소의 생각이나 행동과 다른 스토리를 만들다 보면 내 스토리는 바닥이 날 수 밖에 없다. ‘~척’이 계속되면 피곤할 뿐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남양유업 사태처럼 언젠가 곪아 터질 수밖에 없다. 내가 만드는 스토리가 내 평소의 생각이나 행동과 다르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나에 대한 신뢰는 무너질 것이다. 무너진 신뢰를 다시 쌓는 것은 많은 고통, 시간, 그리고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오가닉 미디어에서는 무너질 탑을 쌓지 않는 것이 정답이다.
3. 청중이 공감하는 스토리를 만들고 있는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스토리는 오래가기 어렵다. 청중이 공감할 수 있는, 참여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청중이 많을 필요도 없다. 나만의 청중을 만들고 그들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함께하는 스토리면 충분하다. 다만 수 많은 사람들이 만드는 스토리의 홍수 속에서 내 스토리에 공감하는 청중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 노력, 그리고 꾸준함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청중이 누구인지 들여다 보면 나의 스토리(개인의 삶, 기업의 현재)가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투명성의 이슈를 추적가능성과 가시성, 프라이버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모든 것이 투명해지고 겉과 속이 같아져야만 살 수 있는 것은 이 사회의 새로운 질서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스토리를 만드는 투명성’에서 답을 찾을 것을 제안하였다. 답을 우리 안에서 찾자는 말이니 쉽지 않게 느껴질 것 같다. 법으로 정하거나 권리를 주장해서 한번에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와 답이 지금 내 안에 있다. 미디어를 사용하는 습관이 내 삶을 규정할 것이고 그 반복이 내 정체성을 만드는 스토리가 될 것이다.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 익숙함을 경계하고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개체만이 자신만의 스토리를 이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는 투명성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했다.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어떤 스토리를 만들 것인가?’가 질문이 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문제 정의가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스토리의 주인이 됨으로서 투명성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당신의, 당신 조직의 스토리는 무엇인가?
<관련 포스트>
글 : 오가닉 미디어랩
출처 : http://bit.ly/10jHt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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