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와 작가, 그리고 융합

Source : http://www.flickr.com/photos/78379698@N07/7183067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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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인해 일본은 이미 망했다”는 취지의 글이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가 되었다. 글의 내용을 읽어보면 나름 많은 근거를 대면서 그럴 듯하게 논지를 이어나갔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글에서 제기한 여러 증거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시한 반대의 글이 퍼지면서,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 싶다.

이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관련이 있는 사례도 하나 이야기 하려고 한다. 최근 모 신문에서 세계적인 미래학자이면서 현재 구글에서 인공지능과 관련한 연구를 하고 있는 레이 커즈와일이 미래를 내다본 인터뷰를 지면에 실었다. 이 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는데,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한 교수님이 이의를 제기하였다. 레이 커즈와일이 이야기하는 인공지능의 미래와 관련하여 “정말 커즈와일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어떤 연구나 증거가 있는지요?” 라고 하시면서 조금은 거칠게 이런 인터뷰 내용과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표출하셨다.

최근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학자와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한 번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글에서 말하는 ‘학자’는 근대 이후 과학적 사고방식과 철학에 익숙하고 그 접근방식을 지지하고 지키는 사람들로 한정짓고자 한다. 대학에서 소설이나 시, 에세이 등을 다루는 문학이나 음악과 미술과 같은 예술을 하는 사람은 ‘학자’가 아니고 ‘학문’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어떻게 정의하느냐와 관련한 문제니까 … 이 글에서는 그런 접근을 하는 경우는 그냥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측면을 강조한 ‘작가’로 포괄할 생각이다.

학자와 작가는 기본적으로 이야기에 접근하는 태도가 다르다. 학자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어떤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기술을 익힌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이 하는 이야기와 활동은 분석과 실험 등을 통해서 이를 증명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되며, 불확실하거나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들을 쳐내는 것에 익숙하다. 다르게 표현하면, 실험 등을 통해 증명가능하게 만들어진 것을 바탕으로 확실하게 반석을 다지는 작업을 통해 학문의 체계를 쌓아나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원리를 충실하게 훈련받고, 토론할 수 있으며, 실제로 본인이 직접 연구를 설계하고 연구행위를 통한 결과로 논문이라는 형태의 결과물을 발표하는 작업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을 소위 박사 학위를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평가의 잣대로 삼는다. 작가는 이와 반대이다. 특별한 증명이나 실험 등이 필요하지 않으며, 다양한 이야기나 창의적인 생각을 머릿 속에서 끄집어내어 글이나 그림, 음악 등 다양한 형태의 창작물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보통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감동을 줄 수 있을 때 좋은 평가를 받는다.

참고로 미래학은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학자’ 보다는 ‘작가’의 세계이다. 물론 이 관점에 대해서도 수 많은 미래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은 그렇다. 애시당초 미래는 증명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작가’의 영역이다. 이런 시각에 반박하는 분들은 아마도 미래연구방법론이라는 틀을 통해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미래를 예측한다고 말을 할 수 있을텐데, 개인적으로 미래연구방법론을 열심히 공부한 입장에서 말을 하자면, 미래연구는 과학적이라고 하기에는 연구방법론 자체에서 다양한 수 많은 편견(bias)을 끌어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미래를 과학적으로 예측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다만 개연성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증거와 사람들의 의견청취, 근거자료 취합 등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
학자적 시각의 문제점은 모든 것을 일단 불확실하게 보고, 명확한 증거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에 대해서 일단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에 서게 되고, 이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여러 가지 인간의 사고를 제약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점이다. 과거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는 이런 사고가 사회에 전체적으로 매우 유익했다. 말도 안되는 미신과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세력들이 많았으며, 실제로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도 억압하였다. 종교가 얼마나 과학의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많이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왠만한 사실확인이 가능한 현대사회에서는 과거보다 사회적인 이득은 많이 감소한 것에 비해, 인류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필수적이라고 이야기하는 다양한 혁신적인 사고와 창의적인 접근방식에 대해서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가능성을 감소시키는 부작용의 크기는 점점 커지고 있다. 작가적 시각의 문제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 미신이나 종교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논리가 여기에 적용된다. 그렇지만, 수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고, 다양한 창의적인 발상을 해내면서 그 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동기부여와 자극을 주는 것이 많이 필요한 현대사회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도 많다. 이에 대해서는 과거 더 자세한 글을 쓴 것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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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와 ‘작가’적인 시각의 차이를 알기 쉽게 표현하면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로 이야기 할 수도 있을 듯하다. ‘학자’는 확실히 증명되거나 실험을 통해 나타난 명시적인 증거들만 인정하는 입장에 있으므로 일단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니고, 이런 과정을 통과한 것만 인정하는 ‘화이트리스트’적인 입장에 있다. 그에 비해 ‘작가’는 모든 것이 창작가능하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금지될만한 것, 부정적인 것들을 금지시키는 방식의 ‘블랙리스트’적인 입장에 설 것이다. ‘화이트리스트’는 사회의 법규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사전규제’에 가깝고, ‘블랙리스트’는 ‘사후규제’에 가깝다. 그러므로, ‘화이트리스트’ 방식이 우위인 사회는 허용된 것만 하게 되므로 보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고 ‘블랙리스트’ 방식이 우위인 사회에서는 일단 모두 허용되고 나중에 문제되는 것들에 대한 사후조치를 취하게 되므로 혁신이 잘 나타나는 경향성을 띤다. 그런 측면에서 미래사회에서는 ‘작가’적인 성향도 많이 필요하다. 지나치면 사회에 독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시각과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협력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작가’와 ‘학자’는 모두 우리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들의 조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 사회의 미래가 더욱 밝아질 것이다. 그런데, 근대사회 이후에 ‘학자’의 위상이 날이 갈수록 올라가면서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학자’적인 사고를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이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때문에 모든 것이 계량화되고, 논리를 중심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는 굉장히 위험한 상황을 낳을 수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일본’과 관련한 글이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글쓴이는 과학적인 듯한 논거를 이용해서 글을 쓰면서, 사실은 날조된 증거를 가지고 주장을 펼쳤다. 이 글을 읽은 많은 독자들은 이 글이 창작이므로 그럴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글쓴이를 ‘작가’로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입장에 있기 보다는 ‘학자’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증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면 많은 독자들은 사실에 대한 혼동을 하게 되고, 잘못된 판단을 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반대로 레이 커즈와일의 인터뷰 기사는 분명히 ‘작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창의적으로 개진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려고 하였다. 이 경우에는 그냥 그런 의견도 있구나 하면서 받아들이고, 나도 모르는 내용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동기부여를 받아서 이런 저런 자료들을 찾아보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접근방법에 대해 지나치게 ‘근거’를 들이대는 분위기가 일반화되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 물론 그런 접근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학자’적인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또한, 그렇게 훈련받았고 … 다만 우리 사회가 여러 가능성있는 이야기와 불확실성에 대해 참아내는 능력이 부족하고, 사회분위기도 이런 ‘학자’적인 접근을 선호하며 알게 모르게 우위에 서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중요한 것은 ‘작가’적인 입장과 ‘학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고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잘 맞추는 것이다. 그래야 혼란이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작가’에게는 창의적이고 공감이 가면서, 멋진 이야기를 기대하며, ‘학자’에게는 진리가 무엇이고, 어떤 것의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것을 기대한다. ‘작가’이면서 ‘학자’인 척하거나, 근본적으로 ‘작가’적인 접근을 할 수 밖에 없는 학문을 ‘학자’적인 접근을 어설프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대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작가’적인 시각을 인정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범람하면서, 다소는 엉뚱한 시도가 많이 나타나도록 하는 ‘학자’들의 관대함도 필요하다.

융합은 그런 측면에서 이질적인 두 집단을 단순히 섞어놓거나, 어설프게 결합시키려고 하면 크게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학자’들의 융합은 상대적으로 쉽다.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바탕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꾸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작가’와 ‘학자’의 융합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소위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융합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진 두 집단이 억지로 하나로 결합되는 것은 존 스노우가 ‘두 문화’에서도 밝혔듯이 굉장히 어려우며, 별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되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는 것에서 융합은 시작된다고 본다. ‘작가’는 ‘학자’들이 진행하는 방식의 학문의 발전을 치하하고, ‘학자’들은 ‘작가’들의 창의적이고 다소는 엉뚱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어야 한다. 어느 한 쪽의 접근방법을 짓누르고 폄훼하기 보다는 협력을 통해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 융합의 핵심이다. 그런 측면에서, ‘학자’로 트레이닝을 받고 그 내용을 잘 알면서도 ‘작가’적인 시각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끌어내서 이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결국 융합을 성공시키는 가장 중요한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S. 개인적으로 필자는 ‘학자’라기 보다는 이제 ‘작가’라고 본다. 물론 간혹 ‘학자’ 역할을 해야할 때도 있다.

글 : 하이컨셉
출처 : http://health20.kr/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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