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팩터는 미디어 경험의 규정. 폼팩터의 고민에 앞서 먼저 미디어를 정의하고 모델링함. (1편)
폼팩터는 미디어의 정의에서부터
폼팩터는 경험을 위한 구조물이다. 따라서 폼팩터에 대한 논의는 어떤 경험을 정의할 것이냐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웹 검색, 문서 작성, 게임, 통화, 영화, 음악, 책, 방송, 소셜 네트워크, 이런 다양한 경험들로부터 어떻게 일정한 폼팩터의 방향을 도출할 수 있을까. 이런 다양한 경험들을 단순화하여 아우를 수 있는 모델링, 그리고 이를 통한 경험의 세분화가 필요하다.
이 모델링을 위한 핵심어는 바로 ‘미디어’다. 사람들이 사유화되고 개인화된 기기에서 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미디어와 관련되어 있다. 보통 우리가 흔히 언급하는 미디어[매체]라 함은 컨텐트의 기록과 전송의 포맷을 지칭한다. 티브이, 신문, 시디, 디브이디, 인터넷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어로서의 ‘미디어’란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컨텐트, 그리고 그 전달의 구성을 좀 더 확대 적용해 보면, 예를 들어 엑셀 작업이나 친구와의 잡담 통화도 ‘미디어’ 행위의 일부로 볼 수 있다. 형태는 다르지만 분명 컨텐트의 생성, 전달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미디어 개념이 컨텐트 소비 영역에 한정된 것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미디어는 소비뿐 아니라 생산이나 통신 등 더 다양한 행위를 포함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굳이 이렇게 미디어의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경험에 대한 단순화된 모델링과 명료한 세분화를 위해서이다. 일반적인 분류법-컴퓨팅 기기, 통신 기기, 미디어 기기-으로는 새로운 폼팩터를 정의하는 데 한계와 함정을 가지고 있다. 이미 컴퓨팅을 위한 컴퓨팅 기기, 통신을 위한 통신 기기를 설계하던 시대가 아니다. 미디어라는 융합점으로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앞서 컴퓨팅과 통신을 ‘엔진’과 ‘도로’, 미디어를 ‘자동차’에 비유한 것도 그런 배경이 있다. 엔진이나 도로의 형식 요소가 아니라 자동차라는 포괄적 경험을 정의하는 폼팩터, 바로 이런 관점의 전환이 앞으로 디지털 기기 폼팩터의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미디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다. 감각 기관을 통해 미디어를 감지하고 인상을 새기는 행위 자체가 다른 사람과 공유될 수 없다. 따라서 미디어 모델링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다. 흔히 요즘의 새로운 미디어 현상을 매스 미디어에서 퍼스널 미디어로의 진화로 표현한다. ‘매스’의 의미는 동일한 컨텐트가 다수 대중에게 짧은 기간 동안 전달된다는 것이고, 그에 대비해 ‘퍼스널’의 의미는 다양한 컨텐트-개인 자신이 생산한 것을 포함하여-가 다수의 개인에게 골고루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런 단어 채택이 어찌 되었든, 컨텐트가 ‘매스’이든 ‘퍼스널’이든, 소비 경험 관점에서 볼 때 미디어는 지극히 ‘퍼스널’하고, 그 미디어 소비 환경은 항상 ‘퍼스널’을 지향한다. 단지 개인은 주어진 유한한 자원과 타협하며 다소 ‘퍼스널’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갈 뿐이다.
영상 미디어의 예를 들어보면, 사람들은 늘 제한된 시공간의 시청 환경에 타협해 왔다. 실황 공연은 전국에 딱 한군데 극장에서 그것도 단지 몇 차례만 열린다. 영화는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영화관의 숫자는 몇 개뿐이고, 상영 시간은 엄격히 정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티브이는 혁명에 가깝다. 하지만 티브이도 가족 구성원의 공유 스크린으로서, 거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 설치되어 있다. 티브이가 제한된 공간에 밀폐되어 있기 때문에, 시청 시간도 그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시간으로 제한되었다. 그리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정해져 있다.
한편, 피시와 인터넷의 발전은 개인의 욕망을 채워주는 수준을 지속해서 높여주었다. 컴퓨팅 단말기는 성능이 좋아지면서도 포터블한 형태를 지향하였고, 점점 빨라지는 인터넷망은 보다 고급 포맷의 미디어 전달을 가능케 했다. 공유하는 스크린이 아니라 개인화된 스크린에서, 정해진 시간에 일방적 방송 컨텐트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시간에 컨텐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환경 변화는 한 개인에게 주어진 시공간적 자원을 대폭 확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대가족 개념의 파괴와 개인적 가치의 존중이라는 사회적 변화의 흐름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이런 미디어의 개인화 현상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미디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따라서 개인화는 미디어의 본질적 지향점이다. 기술의 발전은 이 지향점을 도와주는 방향으로 진행해왔다. 폼팩터의 방향도 마찬가지다. 폼팩터의 고민은 미디어 수용자인 개인의 경험을 규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미디어 모델링: 개인과 세계의 연결고리
미디어는 어떤 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세계를 규정하고 있는 진실들이다. 미디어는 말하자면 진실을 전달해 주는 매개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진실을 깨닫고 온전히 그것을 전달해 줄 수 있을까. 그것은 이상적인 얘기다. 사람들은 진실을 모사(模寫)할 수만 있다. 개인은 오감을 통해 감지되는 진실의 세계에 대한 인상(印象)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개인이나 집단의 욕망도 투영된다. 진실은 그렇게 나름대로 해석된 형태로 모사-송신-수신되어 사람들의 감각 기관으로 입력된다. 바로 이 ‘모사-송신-수신’의 단계가 미디어의 영역이다.
좀 더 원초적인 형태로 보자면, 암각화나 장승 같은 조형물도 미디어다. 모사자와 수용자 사이의 송신-수신이 동일 장소에서 시간 차이로만 존재할 뿐이다. 구술도 미디어다. 기록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하고, 직접적인 대면 전달의 방법을 갖는다는 차이만 있다. 인간이 태초 이래로 이야기를 만들고 전파하는 모든 행위에 미디어가 존재한다.
‘모사’의 결과물은 바로 컨텐트다. 그것은 음성, 춤, 음악, 연기, 그림, 사진, 글 등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다. 그리고 디스크, 테이프, 책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된다. 아날로그일 수도, 디지털일 수도 있다. 컨텐트가 어떻게 표현되고 기록되느냐를 규정하는 포맷이 미디어의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 발전 방향은 표현력을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얼마나 진실에 가깝게 표현하느냐-에 달려있다. 텍스트보다는 사진, 사진보다는 동영상, 동영상보다는 양방향의 몰입형 컨텐트가 더 발전된 모습이고, 정보량은 지속해서 증대된다.
‘송신’은 컨텐트가 흘러가 전파되는 플랫폼이다. 물리적 미디어의 유통 시스템일 수도 있고, 텔레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일 수도 있다.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일 수도 있고, 직접적인 대면일 수도 있다. 컨텐트를 최대한 확장 전파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고 기술도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여기서는 컨텐트가 어떻게 전파되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이고, 이는 서비스의 개념으로 풀 수 있을 것이다.
책이나 시디 같은 물리적 컨텐트라면, 어떻게 표지를 디자인하고, 어떻게 홍보하고, 어디에서 판매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스트리밍 동영상이라면, 어떤 브랜딩으로, 사이트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이며, 어떤 검색 방법을 제공할 것인지 등을 결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미디어의 수용자가 경험하기 위해 컨텐트를 선택하는 순간까지의 과정이다.
‘수신’은 미디어의 단말이고 소비자 경험의 접점이다. 공연장이 될 수도 있고, 책일 수도 있고, 재생 기기의 스크린일 수도 있다. 미디어 수용자는 컨텐트 선택을 완료했고, 이제 경험을 시작한다. 이 경험의 환경을 결정하는 것이 폼팩터이다. 티브이, 라디오, 신문, 잡지, 피시, 스마트폰, 태블릿…. 다양한 포맷의 컨텐트가 다양한 서비스의 플랫폼을 거쳐 다양한 폼팩터의 단말기를 통해 미디어 수용자를 향해 재생된다. 수용자는 자신의 오감을 통해 컨텐트를 받아들이고, 마음속에 인상을 남긴다.
폼팩터는 컨텐트의 경험자가 받는 인상이 모사자의 인상과 공명(共鳴) 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고 느낄 수록 감동하고 더 깊은 인상으로 각인된다. 이것이 미디어의 소비이다.
글 : DIGXTAL
출처 : http://goo.gl/iVZG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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