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새로 나온 하루키의 신간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하루키의 책 보다도 더 현실적이었던 것 같다. 하루키 소설에는 늘 등장하는 엄청나게 신비스러운 모험이 등장하지도, 기괴한 인물, 공기 번데기, 양의 탈을 뒤집어 쓴 사람, 등이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번에는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 봤을 법한, 어린시절 우정을 나눈 친구들이 철이 들고 커가면서 그 우정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만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가 특히 이 책이 현실적이었다고 느낀 이유는 나도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의 이름이나 생년월일, 별자리, 혈액형, 사는 곳, 엄마아빠의 고향 혹은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은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너무도 사소한 것들에 기반하여 우정이 싹트게 된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나면, 뭐 그렇게 시덥지 않은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흥분했던가? 라는 생각이 들만한 것들 말이다.
하루키의 소설에서도 쓰쿠루의 다른 네 명의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을 표현하는 쿠로, 시로, 아까, 아오 같은 한자가 들어가고, 쓰쿠루만 그런 색채가 없다. 그런 사소한 것들도 어린 쓰쿠루에게는 충분히 약간의 소외감을 느낄만한 충분한 이유, 혹은 나는 다른 4명의 친구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사춘기 청소년의 눈에는 너무 단단해서 절대로 깨질 것 같지 않던 우정이 깨지는 것은 대부분 어른이 되면서 바뀌어버린 세상을 보는 시각 탓도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다른 친구들에게 갖고 있던 스스로도 통제하기 어려운 질투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갖고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았던 친구들이 바다에 나오는 순간 방향성을 잃고 말았다. 그제서야 보이기 시작하는 서로의 차이점과, 대학, 직장, 여자, 결혼, 연봉 같은 굵직굵직한 주제들이 굳이 아니더라도, 사춘기의 민감했던 감수성에 불을 지펴서 질투심을 유발할 수 있는 주제야 수십가지쯤 더 있는 것 같다. 이제 그 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망망대해에서 헤엄치고 있는 지금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문제는 상대방에게 질투를 유발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 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큰 상처를 입고,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친구를 친구로 대하지 못하는데도, 정작 그의 마음 속 질투심에 불을 지핀 당사자는 아무런 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에는 사회에 나와서 만난 친구들을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한데 모아 놓았을 경우에 이런 예상치 못한 상처주기가 많았다. A라는 어린 시절 친구 그룹과 B라는 대학시절 친구 그룹은 모두 내가 좋아하고, 동질적이라고 생각한 친구들이었지만, 막상 한 곳에 모으니 예상치 못한 부정적인 케미컬이 솔솔 피어난 것이다. 그럴 때면 가운데서 곤란했던 적이 몇번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는 좀처럼 다른 두 그룹을 섞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던 유년시절의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어린시절 나에게 형제와 같았던 친구이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멀어지고 말았고, 그 간극은 절대로 좁혀질 수 없을 것 같이 보였다. 그가 나에게 무심코 했던 말들과, 내가 그에게 무심코 했던 행동들이 서로를 멀어지게 했던 것이고, 지금도 그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다. 함께 했던 시간이 많았던 만큼 상처도 깊게 나는 법인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 이해하지 못할 일들은 많아도 용서하지 못할 일들은 없을 것 같다.
8월에 그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벌써부터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심장이 두근 거린다.
글 : MBA Blogger
출처 : http://goo.gl/Qvgb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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