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기 전의 일입니다. 저는 겨우내 연구소와 실습실을 오가며 기초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보는 전공 기초시험은 화이트보드에 7개의 수리문제를 풀면서 설명하는 구술 고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험에 떨어지면 지도교수를 선택할 수도 없고, 지도교수가 없으니 세부전공을 준비하거나 논문 테마를 잡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들고, 게다가 합격할 때까지 한학기를 기다려 다시 시험을 봐야하는 등 여러가지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그야말로 공포의 시험이었습니다. 역시나 이 시험도 나름 선배들이 복사를 하거나 구술해 둔 내용을 남겨둔 족보가 있었는데 제 기억에 가장 어려웠던 시험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중심극한정리(Central Limit Theorm)를 어린이한테 설명하라’
중심극한 정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기본적인 내용이 나오기도 하지만, 무작위로 추출된 표본평균의 분포가 표본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정규분포에 근사한다는 정리로 표본을 기반으로한 추론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정리입니다(참조). 아니 이걸 어떻게? 갑자기 머리속이 하얗게 되었는데 선배 한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아무리 어려운 이론도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에서 나온 문제야. 어린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는 거라구
우여곡절 끝에 시험에 통과하긴 했으나,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머리속에 이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스스로 고백컨데, 제가 어려운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다음의 두 가지 경우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하나는, ‘보그 병신체‘처럼 내용 없는 말을 포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말에 @sm_park님이 트위터에 올린 Ev. Williams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We often think of the internet enables you to do new things. But people just want to do the same things they’ve always done.
가끔 사업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에 가보면 자신의 상품이나 서비스를 무언가 새롭고 세상에 없던 어려운 것으로 포장하려는 시도를 볼 때가 있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보면 그런 사업들은 애초에 그 시장이나 고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지,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제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만일 열에 하나 그 제품이 정말 새롭고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해도, 제품을 팔 생각이 있다면 오랜 숙고를 거쳐 짧게 그리고 초등학생도 알아 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짧고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숙고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고 있는 가을입니다.
글 : 전성훈
출처 : http://goo.gl/VKAp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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