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NCSA의 모자이크(Mosaic)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이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마크 앤드리센(Marc Andreessen)은 아르바이트 학생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주력 개발팀으로 뽑아주지도 않자, 시카고를 떠나 실리콘 밸리로 갈 것을 결심한다. 그가 실리콘 밸리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회사는 Enterprise Integration Technologies 라는 회사였는데, 이 회사는 주로 보안과 관련한 일을 하는 회사로 인터넷 브라우저와는 거리가 먼 사업이었다. 어쩌면 당시의 그에게 웹 브라우저라는 것은 쳐다보기도 싫은 존재였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는 이 회사에 재직하던 시절에 일생일대의 귀인이 되는 짐 클라크(Jim Clark)를 만나게 된다. 짐 클라크는 쥬라기 공원을 탄생시킨 3D 컴퓨터 워크스테이션을 개발한 실리콘 그래픽스(Silicon Graphics, sgi)를 공동창업한 인물이기도 하다. 짐 클라크는 텍사스 출신으로 결손가정에 학교에서는 문제만 일으켰던 문제아로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퇴학을 당하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생계를 위해 선택한 해군입대를 통해 교육을 받으면서 자신이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쓸만한 군인을 만들기 위해 수학을 가르쳤던 해군선생님들은 오래지 않아 짐 클라크에게 해군들의 수학강의를 맡길 정도로 신뢰를 하게 되었고, 해군의 적극적인 권유로 야간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만학도의 꿈을 키운다. 그는 물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유타대학에서 컴퓨터 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79년에는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뛰어난 수학적 재능과 컴퓨터 과학에 대한 이해는 특히 3D 그래픽 부분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데, 학생들과 함께 3D 그래픽을 구현할 수 있는 그래픽 전용칩을 개발하고, 개발한 칩을 판매하기 위해 IBM이나 HP와 같은 회사들을 접촉하였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미래에 대해 보수적인 전망만 하는 대기업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고 결국 창업을 결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982년 실리콘밸리에 탄생한 된 회사가 바로 3D 그래픽 전용 워크스테이션으로 명성을 높였던 실리콘 그래픽스이다.
초기 실리콘 그래픽스는 2년 가까운 개발기간을 거쳐 처음으로 1984년에 워크스테이션을 내놓게 되는데, 컴퓨터의 가격이 7만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고가였고 범용 소프트웨어가 부족했기 때문이 시장의 냉대를 받는다. 회사를 운영하기 위한 개발비로 대부분의 창업자금을 소진하고 회사의 존폐를 걱정할 무렵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스타워즈의 아버지 조지 루카스의 눈에 띈 것이다.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와 같은 SF 영화를 제작하면서, 특수효과의 중요성을 깨닿고 이를 위한 특수효과팀인 ILM 을 운영했다. 특히, 영화에 3D 그래픽을 입혀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실감나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었던 그에게 마이클 크라이튼 원작의 쥬라기공원(Jurassic Park) 영화화는 최고의 3D 그래픽 기술을 가진 컴퓨터를 요구하였고, 당시 최고의 3D 그래픽 전용 워크스테이션으로 개발된 실리콘 그래픽스의 컴퓨터는 사실 상 유일한 대안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지 루카스의 결단과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최고의 감독, 그리고 실리콘 그래픽스 컴퓨터의 컴퓨팅 파워가 어우러진 3D 특수효과는 쥬라기 공원을 세계적인 히트작으로 만드는데 성공하면서 실리콘 그래픽스 역시 안정된 성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창업 초기 2년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벤처투자자에게 너무나 많은 지분을 양도했던 짐 클라크는 실리콘 그래픽스를 실권을 쥐고 가기 어려웠고, 그 역시도 그 회사를 운영하는 것보다는 가지고 있는 돈을 활용해서 새로운 투자를 하는 일을 더 매력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마크 앤드리센과 짐 클라크의 만남은 실리콘 그래픽스의 동료였던 빌 포스(Bill Foss)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짐 클라크는 처음 만남에서 바로 미래의 컴퓨터 환경이 웹과 웹 브라우저 기반의 산업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마크 앤드리센에게 모든 창업자금을 댈테니 창업을 하라는 제안을 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마크 앤드리센은 짐 클라크에게 440만 달러의 자금을 받아서 실리콘 밸리의 마운틴뷰에 모자이크 커뮤니케이션(Mosaic Communication Corporation)을 설립한다. 창업을 한 마크 앤드리센은 과거 모자이크를 같이 만들었던 NCSA 의 동료들을 불러들여서 새로운 웹 브라우저 개발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모자이크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과 개발인원을 데려간 것, 그리고 이에 따른 특허침해에 대해 모교인 일리노이 대학과 NCSA 의 항의를 받게 되자, 회사 이름을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스(Netscape Communications)라고 바꾸게 되고, 합의금으로 300만 달러에 이르는 돈을 지불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다. 이 회사가 바로 초기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는 조타수의 역할을 해준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Netscape Navigator)를 탄생시켰다.
회사를 창업하고 개발에 매진할 결과,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 첫 버전이 1994년 10월에 공개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해 10~12월까지 3개월이 안되는 기간 동안 200만 건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하며 급격하게 AOL(America Online)이라는 전화접속서비스 등으로 다양한 PC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던 시장을 인터넷 위주의 시장으로 재편시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네비게이터가 나오기 전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화접속 서비스를 제공하던 케텔(KETEL, KT에 인수되어 이후 하이텔이라는 이름으로 서비스), 피시서브(PC-Serve, 이후 천리안으로 통합) 등의 PC 통신 서비스를 이용하였다. 네비게이터의 탄생과 웹 서버의 대중화로 인한 인터넷의 폭발적 성장에 의해 가장 커다란 직격탄을 맞은 곳들이 바로 이러한 PC 통신 서비스 업체들이었다.
오늘날 인터넷의 성공은 사실상 네비게이터의 성공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쉽게 인터넷에 접소할 수 있게 만들었고, 컴퓨터의 용도가 업무용에서 인터넷을 서핑(surfing)하기 위한 것으로 변화된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5년 8월, 짐 클라크는 아무런 수익도 없었던 넷스케이프사를 IPO(기업공개)하는 모험을 시도하는데, 당시 “인터넷=네비게이터”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펼쳐내고 있었던 시절이라 ‘미래의 가치’라는 단 하나의 무기로 나스닥(NASDAQ)에 상장을 도전하였다. 주간사들이 비교적 낙관적으로 ‘미래의 가치’를 계산해서 주당 28달러에 상장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도 처음에는 14달러 정도가 적정하다고 조언을 하였지만, 마지막 순간에 2배인 28달러로 결정해서 올린 것이었다. 이제 일반인들이 이 가치를 믿고 사줄 것인가?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있는 1995년 8월 9일, 넷스케이프사의 주식은 첫날 무려 75달러까지 치솟게 된다. 물론 장이 끝나는 시점에는 58달러 정도로 다시 낮아지기는 했지만, 넷스케이프의 주식공개는 인터넷에 대한 미래와 사람들의 기대감을 표현한 첫 번째 신호탄이었고, 달리 말하면 이날이 바로 ‘닷컴버블(dotcom bubble)’의 시작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날로 24세의 젊은 청년 마크 앤드리센은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하면서,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고 빌 게이츠와 쌍벽을 이루는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빌 게이츠에 의해 넷스케이프가 처절하게 실패를 하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될 줄은 이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후속편에 계속 …)
참고자료 넷스케이프 위키피디아 홈페이지
글 : 정지훈
원문 : http://health20.kr/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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