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쪼다의 가벼움
내가 참 싫어하는 전개방식인데 일단 어떤 단어, 개념의 정의를 사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싫어하는데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무언가를 설명, 묘사, 설득하는 글을 쓸 때의 굴레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쪼다’는 ‘조금 어리석고 모자라 제구실을 못 하는 사람’이다. 맞는 것도 같은데 조금 부족하다. ‘쪼다’에게는 쪼다만의 쪼다 같은 구석이 있는데 사전은 이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지 못하다.
아! 쪼다가 있다! ‘내 직장, 내 옆자리에 쪼다가 있다’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알고 지내던 여자 동기가 한번은 화를 벌컥 내면서 “니 주변에도 쪼다 같은 놈 있어?” 라고 물었다. 물론 내 주변에는 쪼다가 ‘안쪼다’ 보다 많아서 (당연하지 않은가? 어디라도?) 나는 “그럼. ‘쪼다같은 놈’ 정도가 아니라 진짜배기 쪼다… 많지”라고 즉답을 해주었다. 이 세계에는 실로 다양한 쪼다가 수많은 방식과 양태로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참아내야 하는 쪼다는 좀 독특한 쪼다였다. 얘기인즉슨 이렇다.
“한번은 회사 사람들과 함께 실내골프장을 갔어. 일 끝나고 말이야. 우리 부장이 골프에 막 취미를 붙이기 시작해서 골프 좀 친다는 사람은 종종 같이 가줘야 했거든. 하루는 부장하고 나하고 그 쪼다하고 같이 골프를 치러갔어. 몰랐지. 그전에는 그렇게 쪼다인지 몰랐단 말이야.” 나는 ‘뭐, 어쨌길래?’ 하고 심드렁하게 물어보았다. 쪼다쯤이야 이 세상에는 널리고 널렸고, 골프를 칠 줄 아는 쪼다의 얘기라고 해봐야 그다지 듣고 싶지는 않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평소엔 그냥 각자 뿜빠이해서 골프를 치는데 그날은 돈을 걸고 했거든. 많은 돈은 아니야. 멀리 치면 만원, 가까이 붙이면 만원, 먼저 넣으면 만원, 이런 식으로 했어. 돈을 잃어봐야 빨리 는다나? 하여간 재미있게 하하호호하고 잘 쳤는데 그 쪼다가 덩치도 있고 제법 구력도 되어서 돈을 땄어. 뭐, 얼마 안 되니까 하하호호하면서 돈을 모아서 줬지.”
“그런데?”
“그런데 골프가 끝난 시간이 밤 열한 시가 넘었거든. 집에 가려면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단 말이야. 신발 갈아 신고 막 나가려는데 부장이 그러는 거야. ‘어이. 돈도 땄으니까 택시비는 자네가 내. 둘이 같은 방향이지?’라고. 나랑 그 쪼다가 같은 방향이거든. 나는 내키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데 그 쪼다가 ‘네. 그럼요’ 하는 거야. 그래서 뭐 방법이 있나. 부장의 배웅을 받으면서 택시를 같이 탔지. 내가 집이 더 가까우니까 나는 가다가 먼저 내리고 그 쪼다는 나중에 내리면서 택시비를 내면 되는 시스템인거야. 그런데…” “그런데?” 나는 슬슬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내가 예상한 전개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쪼다가 중간에 ‘택시비 반반씩 내죠?’라고 말하는 거야. 허얼!!! 어이없지 않아?” 아, 나는 귀를 씻어버리고 싶었다. 이런 얘기 듣는 거 약하다구!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돈 줬어. ‘알았어요. 반 낼 게요. 얼마 주면 되요?’ 했더니 뭐라는지 알아?” 어이구,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러는 거야. ‘우리 집까지 만 삼천 오백원 정도 나오니까, 육천칠백오십원 주세요’.” 이 말을 하고나서 그녀는 욕을 했다. 음, 욕할 만도 하지. 나는 만 삼천 오백원을 둘로 나누면 얼마가 되는지 즉석에서 계산이 나오지 않는 문과니까 분노가 더 배가했다. 나도 욕을 거들어주었다. 그녀는 내릴 때 만원을 던져주듯 주고 나왔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쪼다가 많다. 내가 ‘내 주변에는 쪼다가 많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내 주변에 흘러넘치는 쪼다들이 분명 이 사회의 곳곳에도 많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쪼다들이 내 주변에만 이렇게 많다면 너무나 불공평하다. 남들의 주변에도 그런 쪼다들이 많을 것이라고 여겨야만 나는 그나마 내 주변의 쪼다들을 견뎌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그녀의 쪼다 사건 이야기는 나에게 힐링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돈 낼 일, 돈 쓸 일이 있으면 선제적으로 ‘내가 낼게. 내가 쏠 게’를 선포하는 편이어서 (아, 이것도 쪼다 아니야?) 소위 ‘금전적 쪼다’에 얽힌 고민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매일 얼굴을 보아야 하고 특히나 그 쪼다가 내 오감이 미치는 반경 내에서 함께 근무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가능한 한 안 마주치고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같이 골프를 쳐야 할 일이 생기면 설사약이라도 사서 먹던지, 택시에 동승을 해야 할 상황 같은 건 갖고 있지도 않은 온갖 기지를 다 끄집어내서 어떻게 해서든 피하는 것이 좋다. 이게 내 지론이다. 왜냐하면, 호기롭게 쪼다의 영역에 한 발 딛는 순간 나도 ‘쪼다’가 되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의 승려 임제의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그 깊은 선종의 뜻이야 여기에서 내가 말하려는 바와 다르겠지만, 쪼다를 만났을 때도 유사하다. 당연히, 죽일 수야 없지만 피한다. 쪼다 바이러스를 퍼뜨릴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어떻게 대처를 하든 쪼다는 주변의 모든 상황과 인물을 함께 쪼다의 세계로 인도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나에게 금전적 쪼다 얘길 해준 여자 동기는 뛰어난 수완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쪼다를 ‘업무적으로 죽였’다. 나라면 회피하고 마주치지 않을 소극적 노력을 했을 텐데 단기간 내에 놀라울 정도의 업무 집중력을 보여 진급을 했고 그 쪼다의 상사가 되어 다시는 ‘택시비 뿜빠이, 육천칠백오십 원’ 같은 대담한 제의를 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결국, 그 쪼다의 얘길 듣고 심장이 조일 것 같은 오그라짐을 느끼면서 어줍잖은 조언을 해주었던 내가 되려 쪼다 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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