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체요절은 고려시대 세계 최초로 발명한 금속활자로 인쇄된 현존하는 문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377년에 인쇄되었으니 1450년 경에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그에 비하여 약 70여년 먼저 만들어졌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과학 기술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세계 문명사의 흐름에서 보면, 이보다 70여년이나 늦게 발명된 구텐베르그의 금속 활자는 근대 문명의 발아를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발명으로 간주되지만, 아쉽게도 고려 시대의 금속 활자는 우리 스스로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라고 강조하는 것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이 기술을 계기로 사람들이 인쇄해 낸 책의 양이 근본적으로 차이나기 때문이다.
1450년 경 구텐베르그가 금속 활자와 이를 이용한 인쇄술을 발명한 직후 유럽에는 인쇄소가 급속히 확산되어, 불과 50년 후인 1500년 경 유럽 전역에 240개 이상의 인쇄소가 만들어졌고 그동안 약 1천만권 정도의 책이 인쇄되었다. 심지어, 아메리카 신대륙의 첫 인쇄소가 멕시코시티에 1520년 경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 확산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1450년 이전까지 유럽 전역에서 필사본으로 만들어진 책의 수가 다 합해서 3만권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 인쇄기술이 책의 보급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유럽에서는 16세기에 약 2억권, 17세기에 약 5억권를 넘어서 18세기에는 10억권 이상의 책이 인쇄되었다.
유럽을 중세 카톨릭 교회의 억압과 질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근대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도 구텐베르크의 기술로 인쇄된 각 나라 언어로 된 성경이 널리 보급되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고, 직접적으로 1517년 루터가 작성한 95개조 반박문이 30만부 이상 인쇄되어 유럽 각국으로 보급되면서 종교 개혁의 도화선이 된 것도 인쇄 기술이 있어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인쇄된 책의 종류를 보면 초기에는 성서가 가장 많았다. 그 이전에는 필사본 성서 한 질의 가격이 집 10채정도 되었다고 하니 초기 인쇄업자는 여기에서 먼저 가장 큰 사업 기회를 발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곧 그 책의 종류도 다행히 이슬람권에서 아랍어로 번역하여 보존되어 온 그리스 로마 철학 서적 등으로 다양화되었고, 이 책들이 보급되면서 유럽의 지성이 살아 나게 되었고 이들은 이후 르네상스의 도래를 가능하게 한 기반이 되었다. (물론, 초기에 인쇄된 책의 절대 숫자로만 보면 싸구려 연애 소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VHS 비디오의 보급이나 인터넷 보급 초기에 포르노가 가장 큰 기여를 한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과연 직지심체요절과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기술은 시대에 미친 영향력에서 왜 그런 큰 차이가 생겼을까?
좀 다른 이야기 하나 더:
중국 명나라의 정화는 1405년 남해 원정에 나서 1433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동해안까지의 뱃길을 개척한 사람이다.
명나라 기록에 따르면, 정화의 원정대는 최대 길이 130미터에 이르는 대형 선박을 포함한 62척의 선단에 2만7천명의 승무원이 탑승하였다고 한다. 15세기 말 바스코다가마의 함대가 길이 10여 미터의 120톤급 3척에 승무원 170명, 콜롬버스의 함대가 길이 20여 미터의 250톤급 3척에 승무원 88명였던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원정대였다.
이 거대한 규모의 원정대는 “명 제국의 건국을 널리 알리라”는 영락제의 명에 따라 항로 상의 여러 나라와 조공 관계를 맺고 그들의 조공을 영락제에게 바치는 것으로 그 임무를 완수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명나라 설립 초부터 “허가된 조공 무역을 제외한 모든 무역과 외부 접촉을 금지”하는 해금(海禁)이 기본 정책이었고, 심지어 청나라 초기에는 반청복명(反淸復明) 운동을 전개하는 반군을 차단하기 위하여 민간은 정부의 허가 없이 일정 규모 이상의 배를 만드는 것을 아예 금지하는 천계령(遷界令)을 내려 극단적인 해금 정책을 유지하였다.
중국답게 대륙의 스케일로 벌인 정화의 남해 원정은 결과적으로 명나라 황제에게 기린을 비롯한 외국의 진기한 조공 물품을 바친 것으로 끝을 낸다. 항로 상의 여러 나라들과 조공 무역 관계가 일정 기간 유지되었겠지만, 그 규모도 미미하였을 것이고 해금령에 의해 오래 유지되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중국 정치 경제에 미친 영향은 기본적으로 없다고 보는게 맞겠다.
정화와 비교할 수 있는 서양의 대표적 탐험가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이다.
그는 1492년 에스파냐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의 명에 의해 인도를 찾기 위한 서쪽으로의 항해에 나서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여 유럽 역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사람이다.
콜롬버스가 발견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온 부, 특히 남아메리카 대륙의 은을 기반으로 에스파냐는 16세기 유럽의 최강국으로 발돋음하여, 16세기 말 무적함대가 영국에게 패하고 17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할 때까지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남미 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유입된 은은 단기적으로는 에스파냐를 유럽 최강국으로 발돋음시켰지만 동시에 이베리아 반도 내의 산업 기반을 완전히 와해시켜 버려, 결과적으로는 17–18세기 유럽의 패권 경쟁에서 네덜란드, 영국에 밀리는 2류국가로 전락하게 만들어 버렸다. 물론 에스파냐의 몰락이 은에 의한 산업 기반 와해 때문인지, 아니면 1492년 유대인 추방령에 의하여 이베리아반도를 떠난 유대인을 따라 금융과 경제의 중심이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해 버렸기 때문인지, 시각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는 있지만 어쨌든 은의 유입이 에스파냐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15세기 유럽에 비하여 훨씬 앞서 있던 당시 중국의 선진 기술로 아프리카까지의 항로를 개척한 정화에 비하여 훨씬 열악한 기술을 기반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결과적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고려의 금속 활자나 정화의 거대 선단은 임금, 황제가 시켜서 시작한 일이었던 반면, 구텐베르크와 콜롬버스는 본인이 큰 돈을 벌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계획을 짜고 이에 필요한 자원을 가진 이들을 설득하여 직접 그 일을 시작해서가 아닐까?
금속활자를 처음 만든 이나 정화 모두 윗 사람의 지시에 잘 따른 것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은 후 그 윗 사람이 시키는 다른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 새로운 일을 시작한 구텐베르크와 콜롬버스는 그 일을 잘 키워서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사방팔방 뛰어 다니며 그 일을 더 크게 만드는 데 몰두하였고, 그 차이가 이 모든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콜롬버스는 에스파냐 황제와의 계약에서 “새로 발견하는 땅의 총독 직책, 그 땅에서 발생하는 모든 매출의 10%, 그리고 그 곳에서 시작하는 모든 사업권에 대하여 1/8을 인수할 권리”를 약속 받았고, 아메리카 대륙의 총독으로서 많은 부를 쌓았다. 불행히도 구텐베르크는 인쇄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빌린 빚을 갚지 못하고 파산해 버렸지만. (VC 투자 받아서 훌륭한 기술까지는 개발하였지만 시장 개척과 현금 관리를 못해서 망한 스타트업이었던게지^^)
이 비교를 지금 사회에서 하자면, 결국 대기업에서 전사 사업계획과 그에 따른 지시에 의해서 시작한 대기업 신규 사업팀과 ‘큰 돈을 벌어 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라면 먹으면서 어떻게든 사람과 돈을 끌어 모아서 시작한 스타트업 차이일 것이다.
대기업 vs. 스타트업.
이 것이 결국 우리의 삶을 바꾸는 혁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아닌가를 가르는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글 : 허진호
원문 : https://goo.gl/8tEZu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