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처음 MP3 플레이어를 만졌던 기억이 가끔씩 납니다. 새한시스템이 내놨던 엠피맨이라는 제품이었죠. PC통신을 통해 공동구매로 팔기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쌈박한’ 스타일을 자랑하던 워크맨이 지배하던 시절이라 사실 겉은 볼품이 없었습니다. 물론 카세트가 아닌 디지털이라는 기능적인 면에서 느낀 신선함은 대단했지만.
PC 잡지 기자로 근무하면서 MP3는 음악이나 기기 모두 생활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매일 같이 냅스터 같은 불법 P2P 사이트에 들어가서 파일을 받아 긴 마감 시간을 달래야 했습니다. 잡지가 PC 쪽이다 보니 MP3 플레이어도 원 없이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만 일로 만나서 그런지 엠피맨을 처음 봤을 때 같은 감흥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리버를 접하게 된 것도 그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LG전자가 ‘아하’ 소리를 탄식소리로 바꾸게 했던, 삼성전자가 ‘예끼’ 소리나게 옙을 만들었던 시절. 중소기업이던 레인콤이 들고 나온 제품 말입니다.
당시 MP3 플레이어는 기능적인 면에만 충실했던 전형적인 ‘공돌이 시각’이 반영된 제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리버는 이런 점에선 조금 달랐던 기업인 듯합니다. 일명 프리즘으로 불렸던 iFP-100이나 두께가 16.7mm로 ‘Sorry Sony’라는 슬로건으로 유명세를 탔던 슬림X, 크래프트로 불렸던 iFp-300 같은 제품 말이죠.
앞서 밝혔듯 물론 당시에는 디자인보다 기능적인 것에 점수를 더 주기도 해서 디지털웨이가 선보였던 10시간 가는 MP3 플레이어에 더 푹 빠졌던 것 같긴 합니다만 아무튼 아이리버가 눈길 끄는 토종업체였던 건 분명합니다.
과연 아이리버는 거침없이 걸었습니다. 국내 뿐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서 1위로 올라서며 플래시메모리 타입 MP3 플레이어 시장을 지배했습니다. 대단한 사건이죠. 사명인 레인콤에서 레인(Reign)은 ‘지배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아이리버는 당시 MP3 시장을 지배했습니다.
이런 지배자에게 어둠을 느낀 건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2003년이나 2004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인콤은 당시까지만 해도 대규모 제품발표회를 하지 않았지만 그 땐 웬일인지 연말에 제품을 발표하면서 삼성동에서 큰 행사를 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온 화두는 ‘애플’이었습니다. 질문도 ‘어떻게 애플과 경쟁할 것이냐?’는 것이었고 양덕준 당시 대표가 주로 한 말도 ‘애플이 들어와도 우린 자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당시 그 자리에서 이 지배자에게 낀 어둠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대학생 신분이던 청년 괴테가 마리앙뜨와네트의 호화 결혼식장에 참석했다가 신부의 불행한 미래를 예감했던 것처럼.
당시는 아직 애플의 아이팟 광풍이 국내까지 상륙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위기감은 상당히 고조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과연 아이리버는 애플과 직접 경쟁을 벌이겠다면서 하드디스크 타입인 MP3 플레이어 H10을 내놨습니다. 정면 승부를 선언한 것이죠. 당시 이 제품을 써봤습니다만 H10은 이미 애플을 닮아 있었습니다. 아이리버는 더 이상 자신의 길이 아니라 애플의 뒤를 밟게 된 것입니다.
링거스에서 나온 <거인과 싸우는 법(이기형 지음)>은 벤처신화를 일궜던 아이리버의 창업자 양덕준 대표에 대한 얘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양덕준 대표는 그냥 인사만 해본 적이 있긴 하지만 언뜻 보면 인심 좋은 시골 아저씨가 딱 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대기업 아니면 살기 어려운 우리나라에서 아이리버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낸 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아이리버가 애플에게 한 방 맞고 쓰러지는 듯한 분위기였던 때 “아이리버가 우리가 아니라 미국 기업이었다면 이미 애플 수준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많았습니다.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이겠지만 실제로 아이리버가 거인과 제대로 싸우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싸움을 벌인 기업인 건 분명합니다.
책은 양덕준 대표와의 만남부터 시작됩니다. 처음과 끝은 병원에 입원 중인 양 대표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찬찬히,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마치 겨울동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지만 개인적 면모를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물론 이런 감성 수프를 먹인 다음에는 숨가쁘게 아이리버의 탄생부터 몰락(?)까지의 과정을 그려갑니다. 이 부분은 창립멤버 인터뷰를 위주로 한 뭐랄까 감성은 빠진 객관적 묘사 중심입니다. 조금 지루한 구석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국내 MP3史를 짚어볼 수 있어 좋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은 한 마디로 ‘안타까움’입니다. 개인 양덕준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아이리버에 대한 것이죠. 책 제목처럼 아이리버는 애플이라는 거인과 싸웠습니다. 유리온이라는 온라인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를 뒤늦게 내놨지만 100억 원이 넘는 손실을 봐야 했고 와이브로 게임기는 목업만 CES에 내놨다가 철수하는 등 100억 원을 또 밑져야 했습니다.
아이리버의 장기였던 MP3 플레이어는 앞서 언급했던 H10처럼 어느새 애플의 모조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리버는 당시에는 책에 나온 표현처럼 ‘시장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이런 일련의 과정을, 그것도 이미 결과를 아는 과정을 읽어 가는 건 꽤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드라마도 뻔해도 좋으니 늘 해피엔딩을 원하는데 말이죠. 하지만 양 대표는 삼성이라는 잘 나가는 회사에서 나와 레인콤을 설립했는데 당시 심정은 정말 ‘조직에서 나오면 세상이 까마득해진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아이리버 역시 당시에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나가 세상과 경쟁을 하려니 까마득했을지 모릅니다. 비록 해피엔딩이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우리가 박수를 보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런 게 아닐까요.
이제껏 읽은 IT 관련 서적은 모두 외국인의 얘기였습니다. 옆집 근처에도 있지 않을 것 같은 스티브잡스 아저씨나 기차 타곤 죽어도 갈 수 없는 실리콘밸리 이야기. 하지만 이 책은 우리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 점 때문인지 와 닿는 구석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책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과연 아이리버처럼 할 수 있는 기업이 다시 이 땅에서 나올 수 있을까? 책을 덮으면서 감히 상상해봤습니다. 나올 수 있다. 나와야 한다. 꿈을 꿔야 이뤄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꿈을 꿀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아이리버 역시 패배하거나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중요한 건 이젠 우리가 거인과 싸우는 방법을 꿈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둠이 대지에 깔리는(Darkness reigns the earth) 그 순간을 기대하면서.
글 : LSWCAP.COM
출처 : http://lswcap.com/8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