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와 미팅을 하다보면 ‘쟤는 바보인가?’ 싶은 순간이 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바보처럼 굴어서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다.
나는 4년 전에 외국에 파견을 다녀와서 잠시 한직에 머문 적이 있다. 그 해당부서는 겉으로는 기획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홈페이지 홍보, 인터넷 댓글 관리, 비품 구매 등의 일을 하고 있었다. 팀은 애초에 홍보나 디자인을 담당하는 사람들로 구성했는데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중간에 이직을 하거나 다른 부서로 전근신청을 해서 옮겨갔다. 그리고 점차 다른 곳으로 옮기기 애매하고 현재 하는 편한 일이 이래저래 팔자에 맞는 사람들만 남아서 중장기 전략이나 비전 같은 것 고민없이 day by day 업무를 해치우는 독특(?)한 부서가 되었다.
그런데 모니터 보다가 자판 두드리고 물건 사오는 일이 뭐 그렇게 긴요한지 이 부서에서는 종종 의견충돌에서 시작된 감정적 싸움이 벌어졌다. 회의나 미팅을 하면 신경을 미묘하게 긁는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데, 나는 가능하면 아침 출근길에 들었던 라디오 DJ의 멘트나 어제 먹은 안주의 맛을 기억해내면서 그 분위기에 접촉되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이 기억난다.
감정적 싸움과 미묘한 신경전의 출발점을 하나로 정리하면 ‘바보짓’이었다고 나는 단언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팀장이 “지난 번 책장 시장조사 해보라는 건 어떻게 됐지?”라고 묻는다. 여기에는 크게 보아 ‘했습니다’, 또는 ‘아직 못 했습니다’의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그런데 담당자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지난 번에 책장 확인하라고 하셔서 종류는 확인했는데 시장조사를 해야 하는 겁니까?” 아, 이쯤 되면 나는 어제의 오징어회는 좀 더 잘게 썰어서 내놓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 대화는 이제 담당자가 책임감이 있네 없네, 책장 시장조사가 내 일이 맞네 안 맞네, 일에 내 일 남의 일이 어디 있냐, 그걸 꼭 내가 해야 하느냐로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꼬리를 물렸으니 어느 한쪽의 언성이 높아지고 말싸움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팀장이 말한다.
“지금 고객 게시판에 질문 두 개가 올라왔는데 이틀이 지나도록 답을 안 달았어. 미스 장, 그거 언제 할 거야?” 미스 장은 대답한다.
“네, 오늘 할게요. 그런데 팀장님…” 아, ‘그런데 팀장님’이라니 예감이 좋지 않다.
“회사측에서 다는 댓글은 3일 이내에 하면 된다고 조차장(인접 부서에 있는 팀장과 사이가 안 좋은 사람)님이 그러던데요?”
“뭐? 조차장이? 조차장에게 그건 왜 물어봤어?”
“아니요, 물어본 게 아니구요. 지난 번에 팀장님이 홈페이지 관리 규정이 없어서 만들어야 하는데 전략실(조차장이 전략실에 있음)에서 안 만들고 있다고 하시길래…”
“그걸 조차장에게 왜 말했어?” 아, 이제 나는 아침에 DJ가 선곡해서 틀어준 노래의 순서를 기억해내려 애쓰면서 귀로 들어오는 음성들이 뇌까지는 오지 않도록 차단해야 한다.
나는 가끔 직원들과 간단히 대화를 나누거나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상급자가 물어보는 핵심적인 질문에 지혜롭게 대답하는 방법에 대해 넌지시 얘기해줬다. 물어보는 질문에 맞는 명확한 짧은 대답을 하라, 예 혹은 아니오로 대답이 가능한 질문에는 우선 예/아니오를 답해 놓고 추가 설명을 해라, 물어보지 않았거나 사안이 다른 내용을 구지 보고에 넣지 마라 등등 조직생활에 아주 기초적인 행동 규칙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한 사람은 말할 때는 알아듣는데 회의가 시작되면 여전히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팀장과 언성을 높여 싸웠다. 일단 시작된 언쟁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화로 속의 잔불처럼 남아 있다가 무엇이 되었건 불씨가 될 만한 일이 생기면 그것을 핑계로 폭발했다.
나는 이것이 팀을 아우르고 명확히 선을 그어주어야 하는 팀장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매일처럼 팀장과 툭탁거리는 한 직원과 동행하여 강남에 소재한 A 협력업체 미팅을 다녀오고 난 뒤로 생각을 바꾸었다. 그 직원은 바보였다. 그 협력업체는 SNS 홍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작은 스타트업이었고 우리는 전략실장의 지시에 의해 업체 규모와 능력을 확인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아 간 참이었다. 이 직원은 협력업체의 대표가 한참 설명을 하고 있던 도중에 말을 자르고 ‘알고리즘이 뭔가요?’라고 질문했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는 대표의 말을 또 자르더니 ‘그렇다면 알고리즘이라는 것은 프로그램이라는 건데 그걸 개발하는 프로그래머 같은 경우 별도로 그런 걸 배우는 과정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음… 이 사람은 그냥 궁금한 게 ‘느껴지면’ 뇌를 거치지 않고 입이 움직이는 타입이구나, 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나의 결론이다.
다른 한 사람은 내가 이런저런 소소한 얘기 끝에 조심스럽게 ‘팀장님이 회의시간에 뭐 질문하시면요…’까지 말하자마자, 갑자기 ‘제가 너무 필요 없는 얘길 했죠? 아유, 참… 저는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닌데 제가 너무 어리석었나 보네요. 죄송해요’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랩퍼가 속사포랩 쏟아놓는 줄 알았다. 물론 그녀는 다음 번, 그 다음 번에도 계속 같은 식으로 불필요한 말을 했고 회의석상에서 늘상 핀잔을 들었다. 팀장과의 사이는 매우 나빠져서 회의 도중 두 번 울었고 직원들끼리 모이면 어떤 대화의 소재이건 꼭 팀장의 욕으로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러는 걸까’하고 답답해하던 참에, 어느 날 있었던 회식 자리에서 이 여자의 정체를 알았다.
팀 전체가 횟집에서 회식을 하던 그날 그녀는 아무도 원치 않는 팀장의 옆자리에 배석되었다. 나는 반대편에 앉아 있었는데, 차를 가져와서 술잔을 받지 않았고, 팀장과 개인적으로 친한 것도 업무적으로 지시를 받는 것도 아닌 상태여서 별 말이 없이 묵묵히 있었다. 그런데 평소 팀장을 서슴없이 까고 팀장 얘기만 나와도 질색을 하던 그녀가 팀장님, 팀장님 하면서 술도 따르고 잔도 비우지 않았는데 ‘한잔 하시겠어요?’ 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잠시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이면 이런저런 화제도 먼저 꺼냈다. 그래서 나는 ‘아, 이 여자는 선천적으로 수다스럽고 주책 맞은 사람이구나’ 하고 수긍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여성의 수다와 주책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바보들이 하는 바보짓을 바라보고 더러는 나도 바보의 일원으로 바보짓을 따라하면서 그 사무실에서 반년을 보냈다. 그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 업무협조 차 연락을 하고 메일을 주고받으면 아직도 그들은 툭탁툭탁, 우당탕탕 티격태격하면서 바보짓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다. 3/4분기 사무비품 신청을 했느니 안 했느니, 홈페이지 갤러리의 사진이 몇 달이 지나도록 그대로라느니 언성을 높이거나 울 일이 절대 아닌데 그렇게들 살고 있다.
그런데 문득 든 생각은, 가만히 보면 2015년 시장 전망 보고서를 썼느니 안 썼느니, 말레이 지사의 상반기 실적이 작년만 못하다느니 등의 문제로 언성을 높이고 서로 스트레스 주고받아가면서 업무를 처리한답시고 밤을 새는 다른 부서의 소위 인텔리들 그리고 나도 그들과 같은 바보이고 그 속에서 대부분 바보짓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는 요즘, 오늘이다.
글/벤처스퀘어 남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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