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국토를 가진 나라에 사는 탓인가. 우리 한국인은 웬만하면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회의가 있으면 무조건 모두 하나의 방에 모여서 서로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는데 익숙하다. 이메일이나 전화로 소통하는 것보다 웬만하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을위치에 있는 회사가 갑회사에 뭔가 제안을 하려면 아무리 멀어도 직접 가서 얼굴을 맞대고 미팅을 해야한다. 중요한 계약을 놓고 상대방에게 “전화로 회의하자”고 하는 것은 실례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되는 편이다. 식사나 술 한잔을 통해 더욱더 친밀감을 쌓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직접 경험해본 미국의 비즈니스문화는 달랐다. 얼굴 안보고 전화로만 회의를 해도 전혀 문제가 안된다.
처음 라이코스에 가서 경험한 일이다. 세일즈팀의 콜린과 이야기하는데 “곧 미팅에 들어간다”고 한다. 누구와 만나냐고 했다. 야후란다. 아니 우리회사의 중요거래처중 하나인 야후사람이 캘리포니아에서 보스턴까지 출장을 왔나? 그런데 왜 이 친구는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 그런 의문이 순간 꼬리를 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야후사람이 우리 사무실을 방문한 것이 아니고 전화로 그쪽과 컨퍼런스콜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외부사람들과 하는 웬만한 회의는 전화로 하는 컨퍼런스콜이다 보니 그냥 ‘미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사내직원들끼리 하는 회의를 빼고 외부쪽과 하는 대부분의 회의는 컨퍼런스콜이었다.
왜 그럴까. 일단 국토가 광활하고 지역에 따라 시차가 존재하는 미국에서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뉴욕같은 대도시에 위치한 회사들을 제외하고 웬만한 큰 미국회사가 모든 거래처를 한두시간 이내에 직접 운전하고 가서 만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예를 들어 라이코스의 가장 중요한 거래처인 야후와 구글은 모두 서부 실리콘밸리에 있다. 비행기로 보스턴에서 6시간반을 가야하며 시차도 3시간이나 난다.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다. 야후와 구글의 라이코스 담당자는 일년에 한번정도 보스턴에 들러서 보스턴지역의 파트너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시간을 갖곤 했다. 그 정도다.
그렇다고 비즈니스상대방에게 전화를 쉽게 걸수 있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할 때는 서로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다짜고짜 상대방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거의 없다. 상대방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미리 이메일로 “몇날 몇시에 무슨 용건으로 전화를 걸어도 되겠느냐”고 확인하는 것이 매너다. 다른 시간대에 있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다.
미국에는 본토에 동부, 중부, 마운틴, 서부시간대 등 4개 시간대가 있고 그밖에도 알라스카시간, 하와이시간 등 총 9개의 다른 시간대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에 근무하는 사람이 무심코 오후 4시에 보스턴의 비즈니스상대방에게 전화를 건다고 해보자. 보스턴은 이미 저녁 7시다. 그는 귀가해서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있는 상대방의 사생활을 침범하는 무례를 범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주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이렇게 하면 안된다. 페이스북이 유달리 미국에서 인기를 끈 이유도 서로 다른 시간대에 흩어져 사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서로 안부를 전하기가 쉬워서인 까닭도 있다.
어쨌든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회의시간이 잡히면 대개는 캘린더(일정)관리 소프트웨어로 참석자들에게 초대메일(인바이트메일)을 보내서 참석자명단과 컨퍼런스콜 전화번호를 공유한다. 메일을 받은 사람은 참석(Attend)한다고 확인 버튼을 눌러주면 된다.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이렇게 캘린더로 서로 일정을 공유한다. 이렇게 해주면 자동으로 스마트폰 등의 캘린더에도 서로 싱크되기 때문에 편리하다.
처음 들어보는 회사라도 지인을 통해 이메일로 소개를 받으면 일단 관심을 갖고 이메일로 대화를 시작한다. 어느 정도 서로 목적이 파악이 되면 컨퍼런스콜 시간을 잡은 다음, 전화로 회의를 해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서로 협업할 거리가 있으면 다시 이메일이나 추가 컨퍼런스콜로 일을 진행한다. 계약서도 이메일로 주고 받으며 수정하다가 확정이 되면 PDF파일로 만들어 교환한다.
계약서를 인쇄해서 사인한 다음 다시 스캔해서 보내면 끝인 경우가 많다. (인감도장, 막도장을 찍는다든지 하는 불필요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아주 중요한 계약이 아니면 계약시작부터 종료까지 상대회사 담당자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는 일도 흔하다. 회사의 신용도는 신용평가회사의 데이터베이스를 조회해서 확인한다. (보통 D&B 같은 신용평가회사의 데이터를 확인한다. 물론 이 데이터베이스에서 신용도가 낮은 것으로 나오면 거래하지 않는다.)
이처럼 전화통화로만 일을 하다가 실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업계컨퍼런스다. 일년에 한번씩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라스베가스 같은 대도시에서 열리는 CES, 애드텍 같은 업계컨퍼런스는 업계사람들을 실제로 만나고 식사라도 한번 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다. 주로 사업개발이나 영업팀 사람들이 가는 편이다. 그래서 이런 컨퍼런스에 갈때마다 미리 ‘진짜’ 미팅약속을 빼곡히 잡아두고 떠난다. 이런 자리에서 진짜 중요한 계약이 이뤄지기도 한다.
이처럼 미국의 직장문화는 ‘드라이’하다. 반면 실용적이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미팅 한번하려고 몇시간을 길에서 버리는 낭비가 없다. 심지어는 한 1시간이나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회사도 컨퍼런스콜로 미팅을 하는 경우가 많다. 얼굴봐야 할 일도 아닌데 뭐하러 가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업을 담당하는 사람의 얼굴보다는 상대방회사의 제품이 주는 가치(Value)를 보고 결정을 내리는 편이다. 드라이하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이런 문화가 편해졌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마지막으로 고백. 나는 사실 이런 컨퍼런스콜을 처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영어가 딸리기 때문이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하는 회의에서도 100% 알아듣고 자유롭게 내 의견을 피력하기가 힘든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으로서 전화로 회의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내 나라말로 이야기를 하지 않을때는 잠깐만 딴 생각을 해도 중요한 부분을 놓치기 쉽다. 더구나 통화품질이 좋지 않을때는 더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상대방의 얼굴표정을 보면서 대화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 좋은데 음성으로만 하는 콘퍼런스콜에서는 그것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런 컨퍼런스콜이 곤혹스러웠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역시 쉽지 않다. 그래서 가능하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는 스카이프나 페이스타임을 이용해서 회의를 하자고 유도하는 편이다.
(외국회사가) 한국회사와 일을 할때면 이처럼 언어의 장벽 때문에 컨퍼런스콜을 기피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하지만 이메일을 끝도 없이 주고 받는 것보다 컨퍼런스콜을 한번 하면 단번에 일을 진행시킬 수 있다. 알아듣기가 어려울 때는 상대방에게 천천히 아니면 반복해서 말해달라고 주문하면 된다. 글로벌비즈니스에 관심이 있다면 컨퍼런스콜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것이 좋다.
사족 하나. 미국회사라도 다 이런 원격 회의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문화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컨퍼런스콜을 싫어해서 보고를 들을 일이 있으면 무조건 담당자를 애플본사가 있는 쿠퍼티노로 오라고 해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 위의 라이코스의 경우 컨퍼런스콜을 많이 하는 것으로 쓰기는 했지만 스타트업의 투자피칭이나 중요한 계약을 따내기 위한 미팅, 즉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미팅은 가급적이면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는 것이 낫다. 특히 우리 같은 한국회사가 외국회사나 투자자를 설득해야 할 경우에는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것이 미팅을 성공시킬 확률이 휠씬 더 높을 것이다.
글 : 에스티마
원글 : http://goo.gl/D14D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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