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VR(Virtual Reality, 이하 VR)은 우리 곁에 언젠가부터 존재했다. 존재하지만 의식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는 공기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의식하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VR을 느낄 수 있다.
과거부터 VR은 고가의 장비를 구축해 놓은 장소에서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개인이 별도로 구입해서 체험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다. 하지만 혜성같이 등장한 HMD 개발사 오큘러스와 이를 약 2조 원에 인수한 페이스북으로 인해 개인용 VR 시장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여기에 스마트폰의 높은 보급률과 360 카메라 촬영, 3D 콘텐츠 제작 노하우들이 더해져 VR 시장가치는 더욱 증가했다.
VR헤드셋 HMD의 역사
오큘러스를 필두로, 현재 개인용 VR은 HMD(Head Mounted Display)를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다. HMD은 하버드 대학교 전기공학과 교수 이반 서덜랜드로부터 1968년 처음 개발된 개념이다. 처음 개발된 기기는 너무 무거워서 천장에 고정시키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이후에는 조종사들이 쓰는 헬멧으로 지속적으로 개발되었고, 1995년에 닌텐도가 ‘버추얼 보이’라는 이름으로 일반 사용자용 게임 HMD를 처음 개발했다. 하지만 버추얼 보이도 무게가 2kg가량으로 무거웠으며, 불완전한 기술력으로 떨어지는 몰입감, 콘텐츠 부재, 인지부조화로 인한 디지털 멀미 등으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근 화두가 된 오큘러스는 이반 서덜랜드가 개발한 최초의 HMD와 버추얼 보이와는 달랐다. 그 전의 HMD들은 평면의 디스플레이를 눈앞에서 크게 보여줬던 반면, 오큘러스는 하이브리드 프레넬 렌즈를 통해 시야각을 넓혔으며, 이로 인한 왜곡을 출력 보정으로 변환하는 방식을 채택하여, 높은 몰입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거기에 낮은 무게감과 헤드 트래킹, 포지셔널 트래킹까지, 오큘러스가 그동안의 HMD들과는 다르게 주목받은 이유다.
VR 하드웨어 현황
현재 VR 헤드셋은 PC나 콘솔 기반의 고성능 하드웨어나 모바일 디바이스를 이용하는 방식,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PC 기반인 오큘러스 리프트와 HTC Hive, 콘솔 기반 소니의 PS VR, 마지막으로 모바일 기반 삼성 기어VR 등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우선, 오큘러스 리프트가 실행되는 PC는 높은 사양이 요구된다. 호환되는 PC의 구매액은 약 150만 원에서 200만 원 선이다. PS VR의 경우도 PS4와 PS4 카메라를 별도로 구입해야 하고, 삼성 기어VR의 경우도 호환이 되는 최신 스마트폰이어야 한다. VR 헤드셋 포함 외부기기들을 갖추고 VR을 즐기려면 최소 150만 원에서 최대 300만 원까지의 금액이 필요하다. 만약 조금 더 몰입감 있는 게임 콘텐츠를 즐기기 위하여 Virtuix Omni, KATVR의 제품 등을 구매한다면 가격은 더 올라가게 된다. 여전히 누구나 손쉽게 구매하기엔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다만, 모바일 디바이스를 이용하는 VR 헤드셋의 경우 금액적인 부분에서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다. 또한, 모바일은 PC와 콘솔보다는 저렴한 비용과 상대적으로 공간 제약을 덜 받는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화질에 있다. VR을 즐기기 위해서는 2K 디스플레이로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고, 충분히 즐기기 위해선 4K 디스플레이가 필요하다. 현재 스마트폰에는 2K 디스플레이가 보편화 되어있고, 지난해 소니가 세계 최초로 엑스페리아 Z5 프리미엄에 4K 디스플레이를 탑재해서 출시했다. 곧 모바일에 4K 디스플레이를 탑재하는 것이 보편화 될 전망이지만, 4K 디스플레이가 탑재돼도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한다.
우선, 높은 전력사용으로 배터리 소모가 극심하다. 해결하기 위해선 배터리 용량을 키워야 하는데, 모바일기기의 크기가 커지는 애로사항이 있다. 또한, 고해상도를 지원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기의 발열 문제가 따라온다. 물론 차차 개선되겠지만, 아직은 뚜렷한 대안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과거 삼성 기어VR이 최초로 나왔을 때 발열 문제로 10분 이상 사용할 수 없었던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앞선 두 가지의 문제가 존재하는 한, 현재 모바일 기반 VR로 실행할 수 있는 콘텐츠의 장르는 다소 제한된다.
VR 콘텐츠 현황
현재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360도 영상, 중계, 교육, 직업훈련, 4D용 콘텐츠 등 다양한 장르의 VR 콘텐츠가 출시되어 있다. 대표적인 플랫폼인 구글 플레이 스토어에 250여 개, 오큘러스 쉐어에 2,000여 개, 스팀 VR 스토어에 300여 개 등이 있다. 이 밖에도 페이스북, 유튜브 등이 360도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땐 아직 콘텐츠 플랫폼 시장은 작고, 눈에 띄는 콘텐츠가 나오지 않았다.
예전부터 콘텐츠를 담는 디바이스와 콘텐츠 유통 플랫폼은 플레이스테이션의 파이널판타지, 카카오게임의 애니팡 등 ‘킬러 콘텐츠’가 주도했다. 현재 오큘러스, 퀄컴, 안드로이드 등도 자사의 SDK를 제공하여 콘텐츠 개발자가 몰입감 높은 콘텐츠를 개발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를 통해 ‘킬러 콘텐츠’를 확보하여 VR 콘텐츠 플랫폼을 구축해 시장을 선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국내에선 네이버, 곰플레이어, 아프리카 TV가 360도 콘텐츠를 제공한다고 밝혔지만,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담을 VR 콘텐츠 플랫폼이 아직 없다. 플랫폼이 조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VR콘텐츠는 현재 360도 영상에 집중된 모습을 띠고 있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은 ‘360도 영상을 즐기기 위해 PC 기반의 고가형 VR헤드셋을 사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라는 점이다. 이처럼 국내 플랫폼 현황을 보자면, 아마도 국내 소비자들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스마트폰 기반 삼성 기어VR이나 더욱 저렴한 구글의 카드보드를 통해 360도 영상으로 VR을 경험할 확률이 매우 높다.
또한, 아직 모바일 기반 VR 헤드셋은 하드웨어의 한계로 인해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담기 힘들다. 현재 2K 디스플레이를 기반으로 출시된 스마트폰밖에 없고, 4K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스마트폰이 나오더라도, 문제점인 배터리 내구성과 발열 문제 때문에 모바일 기반 VR로 담아낼 수 있는 콘텐츠 장르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한다. 국내 VR 콘텐츠 시장이 기타 장르의 콘텐츠보다 배터리, 발열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360도 영상이나 기타 영상콘텐츠에 우선 집중해야 할 이유다. 영상콘텐츠로 지속적인 사용자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국내 소비자에게 VR 콘텐츠를 소비할 당위성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VR 시장 현황
무어의 캐즘이론에 따르면, 혁신적인 제품을 꺼림 낌 없이 받아들이는 혁신, 선각수용자(A)에 의해 초기 시장이 형성되지만, 더 큰 시장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실용적인 측면을 중요시하는 전기, 후기 다수 수용자(B)들을 설득해야 한다. 바로 이 단계에서 공백이 생기는데 바로 이것을 캐즘(하늘색)이라 한다.
혁신, 선각수용자(A)에서 캐즘(하늘색)을 넘어 전기다수 수용자(B)로 가기 위해선 하드웨어의 비용을 현저히 낮춰 접근성을 높이든지, 진짜 죽여주는 콘텐츠를 만들어서 당위성을 만들든지 해야 한다. 기존 VR 하드웨어보다 높은 성능대비 낮은 비용의 VR 하드웨어의 등장, 킬러 콘텐츠의 생산 등으로 아직은 부족한 사용자들의 경험을 축적시켜 나아가야 캐즘(하늘색)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접근성(비용)과 당위성이 교차하는 지점(캐즘 극복)에서 VR 시장은 이전보다 명확히 나뉠 것이고, 완전한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캐즘을 극복하고, 혁신, 선각수용자(A)에서 전기, 후기 다수 수용자(B)로 시장이 커지는 과정에서 점점 하나의 하드웨어와 플랫폼으로 수렴되고 규격화되기 때문이다.
캐즘이론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스마트폰과 3D TV, 3D프린터를 생각하면 된다. 스마트폰은 캐즘을 넘어선 사례고, 3D TV는 실패사례, 3D프린터는 캐즘 언저리에 있다.
현재 VR의 글로벌시장은 2017년에 약 8조 원 규모로 형성되고, 2020년에는 VR 시장 규모가 약 81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내는 2017년 약 1조 3천억 원을 시작으로 2020년에는 5조 5천억 원으로 성장할 것이라 보여진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대다수의 전문가가 VR 콘텐츠 시장이 VR 하드웨어 시장의 약 3배가량 더 큰 마켓으로 성장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킬러 콘텐츠’의 확보는 앞으로 VR 시장의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이다.
앞서 화질, 발열, 배터리, 비용, 부족한 사용자 경험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화질과 발열, 배터리, 비용 문제는 하드웨어가 발전하면서 해결될 문제지만 부족한 사용자 경험은 킬러 콘텐츠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킬러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스타트업들은 현재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대처방법은 PC와 콘솔 고성능 하드웨어 기반 VR 헤드셋과 모바일 기반 VR 헤드셋을 모태로 하는 콘텐츠를 기준으로 두 가지 정도로 고민해볼 수 있다.
우선 VR 콘텐츠 현황에서 언급했듯이 국내 소비자들은 모바일 기반 VR 헤드셋으로 영화나 공연 360도 영상 등의 콘텐츠를 소비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업계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용자들은 VR 영상 콘텐츠를 평균적으로 3분에서 5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이용한다고 한다. 대부분 영상콘텐츠가 굳이 VR 헤드셋을 이용하여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므로 스타트업은 잘 짜여진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영상을 봐야 할 당위성을 만들어 사용자들이 영상콘텐츠를 비교적 오랜 시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곧 4K 디스플레이가 탑재된 모바일이 시장에 많이 풀릴 것이기에 영상콘텐츠를 준비하는 스타트업은 모바일의 4K 대중화도 준비해야 한다. 또한, 디지털 멀미를 최소화하기 위해 시점을 고정해놓으면 답답함이 생기고, 답답함을 없애려 카메라를 움직이면 멀미가 생기는 현상들을 지루하고 불편하지 않게 촬영부터 편집 단계까지 해결할 방법들도 많이 연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PC와 고성능 하드웨어 기반 VR 헤드셋은 게임콘텐츠에 최적화된 디바이스기 때문에 게임콘텐츠를 소비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달 오큘러스 리프트가 판매를 시작했지만, 아직 국내에는 충분히 보급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고,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아직 VR 시장은 작다. 또한, VR 게임콘텐츠 제작에는 많은 리소스가 필요하다. 현재 VR에 뛰어든 기업들이 대부분 대기업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트업들은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 아예 형성되지 않은 국내 시장보다는 글로벌 시장이 그래도 승산이 있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시장을 선점하려고 하기보단, 자신만의 강점을 최대한 날카롭게 해야 하며, 타 스타트업과 자사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콜라보레이션을 이루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의 전 세계 VR 시장은 마치 춘추전국시대와 비슷하다. 아직 ‘이것이다’라고 정해진 플랫폼도, 하드웨어도 없다. 콘텐츠 제작기업의 입장에서는 누구에게 어떤 콘텐츠를 어느 하드웨어, 혹은 어느 플랫폼에 제공할지 명확한 답조차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캐즘을 극복하고 혁신, 선각수용자(A)에서 그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때 점점 하나의 플랫폼으로 수렴되고, 규격화되어 갈 것이다. 시장 또한 이전보다 명확히 보일 것이다. 대세를 따라 현재 VR 산업에 뛰어들기보다는 시장이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에 맞는 전략을 세우고 진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초기에 진입하는 것이 유리한 부분이 많겠지만, 왜 지금이냐(Why now?)가 더 중요하다. 자신이 가진 핵심 역량으로 소비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지 냉철히 판단해보고, 언제 시장에 뛰어들어야 최적의 타이밍일지를 고민해야 한다.
많은 전문가가 주장하듯, 올해를 기점으로 VR 시장은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개인 또는 기업, 산업별 전문가, 정부가 한데 모여 똑똑한 방안들을 함께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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