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세계전기통신연합(ITU)이 개최한 ‘아시아 디지털사회정책 포럼’ 에 초청받아 다녀왔다. 한국의 스타트업생태계에 대한 소개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인데 항공료, 숙박비 등도 모두 ITU에서 부담해줬다. 덕분에 동남아시아 정부관련인사들에게 한국스타트업생태계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싱가포르와 태국의 스타트업동네도 잠시나마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정확히 2년전 싱가포르를 방문한뒤 다시 처음 동남아시아권에 간 것인데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스타트업 바람이 동남아시아에서도 예외 없이 불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2년전과 비교해 크게 확장된 싱가포르의 스타트업 단지
포럼 참석 전에 싱가포르를 방문했다. 싱가포르도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앞장서 스타트업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스타트업 생태계의 허브로 만들기 위해 예비 창업가와 스타트업 기업 유치를 위한 정책을 적극 펴고 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유망 스타트업 기업에 직접 투자하고 해외 스타트업 기업들의 아시아 지사를 유치하는 데도 노력하고 있다.
싱가포르 스타트업 생태계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 ‘블록71’이다. 블록71은 싱가포르국립대 인근에 자리한 스타트업 단지다. 2년 전 이 곳을 방문했을 때는 구로공단처럼 보이는 허름한 공장형 건물에 수많은 스타트업 관련 지원기관이 모여 있었다. 2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다시 가 봤더니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스타트업 건물이 블록79와 블록73 건물들로 확장됐다. 예전에는 근처에 커피숍이나 식당도 찾기 힘들 정도로 외진 장소였지만 지금은 이 건물들 사이에 거대한 식당가와 공연장까지 들어서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새로 생긴 블록79 건물 3층에는 싱가포르 최대의 협업 공간(코워킹 스페이스)인 배쉬(Bash)가 자리잡고 있었다. BASH는 Building Amazing Startup Here의 약자라고.
싱가포르 정보통신부(IDA) 주도로 지난해 2월 문을 연 700평이 넘는 공간에는 스타트업부트캠프핀테크, 플러그앤플레이, 핀랩 등 수많은 해외 액셀러레이터(육성업체)들이 들어와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있었다. 마침 스타트업부트캠프핀테크가 10팀의 핀테크 관련 스타트업을 선발, 3달간의 집중 양성과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배쉬의 브루어리(맥주양조장)이라고 부르는 공간에서는 수시로 다양한 스타트업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건물 각 층마다 다양한 스타트업과 벤처투자회사들이 들어차 있었다. 서울 강남의 테헤란밸리를 능가하는 활기와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동남아 일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랩과 우버의 대결
길거리에서는 스마트폰 교통 혁명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말레이시아 출신 스타트업으로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그랩(Grab)이 약진 중이었다. 2011년 말레이시아에서 스마트폰용 앱을 이용해 택시를 부르는 서비스로 출발한 그랩은 우버의 대항마로 성장하고 있다. 택시 호출 서비스로 시작한 그랩은 이제는 ‘우버X’처럼 개인이 보유한 차량을 이용해 택시 영업을 할 수 있는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 출퇴근 시 운전자가 같은 방향의 동승자를 저렴한 가격에 태워주는 ‘그랩히치’라는 서비스도 시작했다.
싱가포르정부가 그랩이나 우버를 규제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현지에 계신 분에게 했다. 그랬더니 택시 등이 모자라는 것이 사실이어서 그랩, 우버 등을 정부가 묵인하고 있는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랩은 말레이시아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쿠알라룸푸르, 페낭 등 말레이시아 9개 도시에서 활발하게 영업 중이다. 지금까지 1,000억원 이상을 투자받은 그랩은 싱가포르 곳곳에서 거대한 광고판을 통해 공세를 펼치고 있고, 필리핀 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다른 나라까지 서비스를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
우버와 그랩은 동남아 각국에서 현지 상황에 맞는 ‘우버모토’ ‘그랩바이크’ 등 독특한 서비스를 내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서비스들은 동남아시아 도시들의 심각한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차량 대신 오토바이를 스마트폰으로 호출하는 서비스다. (방콕에서 한번 써보려고 용감하게 우버모토를 신청했는데 호출한 오토바이가 결국 오지 않아서 써보질 못한 것이 유감이다.)
그랩은 최근 싱가포르에 200명 규모의 연구개발(R&D) 센터를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우버도 싱가포르에 250여명이 근무하는 동남아시아 본사를 개설하고 사업 확대에 나서고 있다.
구글의 싱가포르 거점에는 3천명이 근무하고 있는데 싱가포르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폭 늘리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외국기업을 유치하는데 있어서 싱가포르정부의 능력이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다.
‘스타트업 타일랜드’로 변신하는 태국
태국도 최근 ‘스타트업 타일랜드’를 선언했다. 정부가 5억7천만달러(약 6천500억원)의 창업펀드를 조성, 2년 내 태국의 스타트업 기업을 1만개까지 늘리겠다는 게 골자다. 이를 위해 태국 부총리를 포함한 정부 사절단은 지난달 우리나라를 방문,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등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도 돌아보고 갔다.
태국의 디지털 시장이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는 급격하게 이용자가 늘고 있는 모바일 메신저 라인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을 보면 가늠해볼 수 있다. 태국의 이동통신업체 DTAC의 앤드류 크발세스 최고전략책임자는 “태국의 스마트폰 이용자 가운데 라인과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100%”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기준 태국 인구 6,700만명 가운데 3,700만명이 매달 페이스북을 사용했다. (지난해말 기준 우리나라의 월간 페이스북 이용자 수 1,600만명의 두 배가 넘는다.) 라인의 태국이용자수는 3,300만이다. 태국인들의 페이스북 평균 이용 시간도 하루 2시간35분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페이스북과 라인은 모두 태국에 지사를 설립했다. 태국 정부가 나서 스타트업 육성 계획인 스타트업 타일랜드를 선언한 배경이 수긍이 간다. 이렇게 스마트폰을 열심히 쓰는 국민들이 있는데 해외서비스만 쓰니까 아쉽다는 것이다. 토종 태국스타트업이 만든 모바일서비스가 나와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 같은 스타트업의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태국의 첫 번째 스타트업 협업 공간 ‘허바’(Hubba)다. 일반 주택을 개조해 만든 아담한 공간에 수십 명의 창업자들이 모여 자유롭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을 이용하는 태국인과 외국인 비율이 5 대 5다. 일본 벤처투자업체 ‘사이버에이전트벤처스’는 아예 이 곳에 태국지사 사무실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곳에 둥지를 튼 태국 스타트업 ‘스토리로그’는 이용자들이 스마트폰 앱으로 이야기를 올리고 공유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창업자 피포는 전세계 스타트업 업계에서 경전처럼 꼽히는 ‘린스타트업’을 읽고 자극을 받아 스토리로그를 시작했다. 그는 통신업체들이 개최하는 스타트업 경진대회에서 고배를 마셨다가 나중에 합격해 초기 투자 자금도 받고 멘토도 소개받았다. 현재 스토리로그는 매달 50만명 이상이 이용한다. 이제 초기 투자를 받은 것을 넘어서 휠씬 더 큰 스타트업에서 추가투자를 받아서 시리즈A단계로 들어간다고 한다. 그의 창업과 성장스토리는 여느 한국스타트업창업자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동남아서 큰 존재감 없는 우리 기업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스타트업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투자를 시작했지만 놀랄 만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특히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그랩 같은 교통혁신 서비스와 전자상거래, 핀테크 서비스 등에 대한 관심이 높다. ITU행사에서 가장 사람들의 관심이 높았던 세션은 의외로 핀테크세션이었다. 질문이 끝도 없이 나왔다.
동남아 전역에서 비즈니스를 확장해가고 있는 말레이시아의 이통사 Axiata의 발표에서 인상적으로 본 슬라이드다. 크레디트카드는 물론 은행계좌조차 없는 동남아국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급속도로 보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장차 금융의 중심이 될 것이란 얘기다.
ITU포럼에 참석한 브래드 존스 ‘웨이브머니’ 최고경영자는 “금융 인프라가 낙후돼 국민의 절반 가량이 신용카드도 없고 은행계좌조차 없는 미얀마에서도 최근 모바일 머니가 급속도로 보급되고 있다”며 핀테크 스타트업이 일으키고 있는 변화의 단면을 보여줬다.
중국과 일본의 자본과 유럽과 미국의 기업들은 이를 보고만 있지 않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동남아의 디지털 경제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앞다퉈 뛰어들어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는 최근 동남아시아의 아마존으로 통하는 온라인쇼핑몰 ‘라자다’를 약 6,0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유럽 통신업체와 호주 은행들도 동남아 스타트업들에 투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영역에서 우리 기업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라인을 한국회사라고 여긴다면 라인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싱가포르와 태국 방콕 곳곳에 있는 일본계 백화점과 일본대기업들의 광고를 보며 일본자본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도 여전히 실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동남아시아의 많은 정부와 스타트업들은 앞서있는 우리나라의 스타트업 생태계와 교류하며 경험을 배울 수 있길 갈망한다. 아직 비어있는 영역이 많은 동남아시아시장에 우리 기업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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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기고했던 글을 보완하고 사진을 더 집어넣어서 포스팅.
글 : 에스티마
원문 : https://goo.gl/ho5c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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