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결혼을 앞둔 사람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려고 한다. 여기에 두 명의 여자가 있다. 둘 다 아름답고 성격도 좋아서 나에게 참 잘 하는 사람이다. 단지 차이는 집안의 경제적 수준으로 한 사람은 가난한 노동자 집 자제고, 한 명은 비교적 사는 집의 자제다. 당신이라면 어떤 여자를 배우자로 선택하겠는가?
이미 결혼을 했고 연차가 좀 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거야 당연히 부잣집 자제지 라며 쓴웃음을 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질문을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한다면 의외로 호불호가 갈린다. 적지 않은 수가 가난한 집 자제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 집 자체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생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한다. 그래서 남편을 더 잘 이해해주고 어려움에 대해서 더 잘 공감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부자집 자제는 고생이란 걸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경제적 관념이 없어 함께 가정을 꾸려가기가 어렵고, 나를 이해해주기 보다는 이해받기만을 더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은 이 생각에 반론을 제기한다. 사실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노동자 집 자제는 어렸을 때부터 경제적 제약에 익숙했고, 가능한 것보다는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더 일반적으로 마주하고 살았기 떄문에 그녀를 지배하는 감정은 ‘고생’ 내지는 ‘결핍’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고 치면 머릿속에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고생길’이다. 즉 미지의 존재는 두려움이다. 지금 이루어 놓은 것도 겨우겨우 어렵게 도달한 것인데 왜 또 머리 아픈 일을 시도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남편의 새로운 생각이나 시도에 대해서 가장 적극적인 반대 의사 표명을 한다.
반면에 있는 집 자체의 경우 이 지점에서 다르다. 그녀의 집이 잘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보통 그녀의 부모님은 사업가이거나 투자가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위기 속에서도 가능성을 포착하는 데 있고, 그 가능성에 도전을 함으로써 지금의 부를 이룩했다. 과정에서 실패도 여러번 경험했지만 다시 그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서 마침내 다시 새로운 가능성의 지점에 도달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것이 바로 그녀다. 그녀의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어려움보다는 가능성일 가능성이 높고, 안정보다는 기회일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는가의 질문은 일면 그저 개인의 선호에 관한 평범한 질문처럼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경제학자 마이클 하우스먼은 은행, 항공사, 통신사 등에서 일하는 3만 명에 이르는 콜센터 상담 직원들에 관한 연구를 하는 도중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데, 과거에 이직이 잦았던 직원들이 새로운 직장에서도 더 빨리 그만둘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자료상으로는 뚜렷한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반면에 직원들의 업무에 사용하는 인터넷 브라우저의 종류가 그들의 근속연수와 결근율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사파리 브라우저를 쓰는 직원들보다 크롬이나 파이어폭스 브라우저를 쓰는 사람들이 재직 기간은 15%가 더 길었고, 결근율은 19% 더 낮았다. 그리고 판매 실적, 고객 만족도, 평균 통화 지속 시간 등에 관한 300만 건의 자료 조사를 통해서도 크롬 및 파이어폭스 사용자의 결과가 훨씬 좋았고, 입사 직후 충분한 업무 수행 능력에 도달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역시 한 달 이상 빠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도대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의 업무 숙련도나 관련 업무 특성 때문일까?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이 사용하는 브라우저의 ‘선택’과 관련이 있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사파리는 컴퓨터를 구입했을 때 기본적으로 설치되어 있는 프로그램이다. 반면에 크롬이나 파이어폭스는 별도로 설치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지급된 컴퓨터의 환경을 아무런 생각 없이 따른다. 그것이 느리든, 오류가 있든 없든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반면에 일부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기존의 환경을 따르지만 크롬이나 파이어폭스 같은 브라우저가 더 가볍고 빠르다, 편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발동해서 설치를 해서 어떤가 살펴본다. 그리고 그것이 기존의 환경에 비해 더 나은 점을 제시한다고 판단이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발견을 공유하고 독려한다. 필요하면 그가 직접 설치를 나서서 도와주기까지 한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일면 조직의 업무 생산성에 큰 차이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실제로 업무지표로서 발견되기도 어렵다.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난다. 크롬과 파이어폭스 브라우저를 쓰는 사람들은 원래 노출되어 있는 편안한 익숙함 가운데에서 무언가 다른 지점을 주목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엇, 이건 뭐지? 이건 좀 다른 것 같은데? 라며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보고 괜찮다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주변에 전파를 한다. 부정적인 지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즉, 늘 해오던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과 다른 지점을 채택하는 데 익숙한 것이다.
와튼 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그의 저서 오리지널스에서 이를 ‘기시감 Dejavu’과 ‘미시감 Vujade’으로 구분한다. 자신이 익숙해진 것에 머무르고자 하는 성향을 기시감이라고 부르고, 반면에 익숙한 것 가운데 보이는 작은 차이에 대해 이것은 뭐지? 라며 눈을 반짝이게 되는 지점을 미시감이라고 부른다. 필자는 그것을 ‘차이를 만드는 감각’이라고 정의한다. 이 감각은 꽤나 많은 사회적 현상을 설명한다.
노동자들은 왜 그들을 대변하는 노동자 관련 정당 대신 기득권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을 선택하는 것일까? 왜 청년들이 기성세대들에 비해 도전보다는 교사나 공무원, 대기업 임직원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한 것일까. 왜 상대적으로 안정된 환경의 직장인들이 불안정한 자영업자나 사업가들에 비해 자기계발을 외면하는 것일까? 그들을 현상에 머무르게 하는 기시감은 생각외로 개인의 성장은 물론 조직과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흥미로운 점은 기시감에 익숙한 이들도 그들의 바람은 변화의 너머에 있는 가능성이라는 점이다. 지금과는 다른 지점에 도달하고 싶고, 경제적으로나 자아의 관점에서 자유를 성취하고 싶어 한다. 새로운 기회의 파도를 올라타고 싶어 한다. 단지 그들이 머물러있는 기시감을 미시감으로 돌아서게 하는 지점의 선택을 내리기 어려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만드는 미시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애초에 기시감으로 사는 사람과 미시감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구별이 있는 것일까? 만약 후천적으로 모드를 스위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제 앞으로의 글을 통해서 여러분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미시감으로 넘어가게 하는 마법을 목격할 것이다. 사람이 팔짱을 끼고 소파에 몸을 파묻는 린백(Lean-back)에서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몸을 숙이는 린포워드(Lean-forward) 하게 만드는 관점.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차이를 만드는 지점. 여러분은 알고 싶지 않은가? 이미 필자의 이야기에 눈을 번쩍이는 당신이 보인다.
글/ INHYUK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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