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인문사회과학이론으로 알아보는 직장인의 심리]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출처는 [맹자(孟子)]의 “이루(離壘)” 편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는 중국 고전의 근간인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하나로 사상/철학서, 실용정치서적으로 분류된다. 위나라 혜왕에게 했던 조언을 담은 “양혜왕” 편부터 정치와 학문의 마음자세를 논한 “진심” 편까지 7편에, 각 편의 하위 장을 모두 합치면 25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이루”편에서의 ‘이루’란 사람의 이름이다. 그는 시력이 무척 좋아 백보 밖에서도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맹자는 이루를 예로 들면서 아무리 눈이 밝아도 먹줄이 없으면 물건을 곧거나 둥글게 깎지 못한다고 말했다. 세상을 사는데 법규와 제도가 어째서 중요한 지를 역설한 것이다.
그런데 원전에는 “역지사지”라는 구절이 없다. “역지즉개연(易地則皆然)”의 뜻을 담아 후세에 “역지사지”의 사자성어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역지즉개연”은 ‘처지를 바꾸어도 한결같이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지사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상해서 찾아보니, 중국과 일본에서는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역지사지라는 것은 한국만의 독특한 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역지사지는 우리 방송언론은 물론 일상에서도 자주 쓰는 사자성어다.
상대의 처지를 염두에 두고 배려하라는 덕담은 예방 차원에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의 상황을 생각해서 그를 좀 더 이해해보라고 조언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한다. “조금만 역지사지해보면 제가 왜 그랬는지 아실 겁니다”처럼 답답한 심경을 토로할 때도 쓴다.
자주, 즐겨 쓰기는 하나 이 ‘역지사지’라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다. 덕담과 조언에 한 마디 넣기는 쉬울 것이다. 그러나 남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고 행동에 옮긴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쯤에서 단순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역지사지를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상대의 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없이 ‘역지사지’라고 말만 하기 때문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역지사지란 ‘공감(empathy)’이다. 공감은 동정(sympathy), 투사(projection), 동일시(identification)와 같은 인식작용의 복합이다. 아이젠버그와 밀러의 연구(1987)에 의하면 공감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익혀야 하는 지적이고 체계적인 인지 능력이다. 게다가 정서적으로 상대의 역할과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까지 있어야 (갖추고 태어나는 노력으로 학습하든) 한다. 즉, 역지사지의 시작인 생각, 공감 자체가 쉽지 않다.
둘째, 생각은 하되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라는 것은 결국 상대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거나 행동으로 실천해야 완성된다.
역지사지의 실천이란 결국 무엇이겠는가. 직장에서 나보다 능력이 부족한 자를 배려하여 돕거나 보폭을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경쟁으로 가득 찬 성과 위주 조직에서 그런 것이 쉽겠는가. 또한 나보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하거나 물질을 내놓는 것이다. 그러나 매주 한 시간 노숙자 급식 봉사에 동참하거나 매달 단체 등에 일정한 기부금을 송금하는 이가 몇 명이나 될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말로는 남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해야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상대를 생각하지도 그를 위해 특정 행동을 실천에 옮기지도 않는 경우가 많다.
맹자는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의 첫 번째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들었다. 나보다 못하고 없는 이를 불쌍히 생각하는 것이 인간됨의 시작이라고 한 것이다. 역지사지는 보다 구체적인 실천지침 같은 것이다. 지금 내 일터 주변에 배려와 조언이 필요한 이는 없는지, 사는 곳 근처에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는 없는지 살펴보고 실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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