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항상 가치를 평가하고 정하는 일을 통해 무언가를 판단하고, 행위 여부를 결정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행위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그 행위가 초래할 결과를 예상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인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를 정확하게 산정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대강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하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행동하는 게 보통의 경우가 아닌가 싶다.
경제학 논리로는 물건을 사고 파는 거래 행위의 경우 수요와 공급이 균형이 이루는 점에서 가격이 정해진다고 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는 점에서 최종 가치가 정해진다는 의미인데, 여기서도 문제는 그 정해진 가치가 각자의 입장에서 최상인지 여부는 항상 물음표인 것이다.
그렇다면 벤처투자에서 투자가치는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경제학적 논리에 비춰보면 벤처기업(판매자)과 투자자(구매자) 사이에 서로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는 상태에서 투자가치가 정해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벤처투자에서 투자가치를 정하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판매자(벤처기업)와 구매자(투자자) 사이에 존재하는 기대의 차이, 정보의 불균형, 미래 결과에 대한 불확실 등이 상대적으로 커 더욱 어려운 문제가 되는 것 같다. 벤처투자에 몸 담은 많은 사람들이 벤처투자에 있어 투자가치를 산정하는 것, 즉 밸류에이션(Valuation)은 예술의 영역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정답이 없는 어려운 난제임을 자조 섞인 표현으로 설명한다.
최근 국내 벤처업계에 대규모 VC펀드가 새로 조성된다고 하고 내년에는 더 큰 규모의 자금이 추가로 조성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국가적으로 벤처기업 육성을 통해 일자리 창출과 성장 동력을 확보하려는 정책적 판단으로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벤처투자업계에 몸담고 있는 입장에서는 우려가 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출구가 없는 풍선에 계속 바람을 불어넣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자칫 너무 많이 풀린 VC펀드 자금으로 인해 왜곡된 밸류에이션이 형성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북미 지역과 국내에서 동시에 투자를 진행하면서 최근 일부 사례이긴 하나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높은 투자 가치를 인정받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물론 미국 시장에서 가치가 반드시 높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나, 일반적으로 미국이 벤처투자 시장도 크고 엑싯(Exit) 가능성과 가치가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이 더 가치가 높다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벤처기업과 창업가 입장에서 높은 밸류에이션에 대한 기대는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오랜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서 개발해온 기술과 서비스에 대해 높은 가치를 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기술에 대한 자부심, 사업에 대한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는 창업가에게 높은 밸류에이션은 당연한 보상일 것이다. 특히 창업 초기에 투입되는 자본과 노력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국내 벤처기업 창업가들이 회사에 가지는 애착과 가치에 대한 기대감이 크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처기업 입장에서 높은 밸류에이션이 무조건 좋은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지난 2~3년간 국내에서 높은 가치로 투자를 받아 주목 받던 기업들이 기대에 못 미친 성장과 엑싯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후속 펀딩에 어려움을 겪었던 사례를 감안하면 적정 수준보다 과도하게 높은 밸류에이션은 오히려 벤처기업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높은 가치로 투자를 받게 되면 초기 계획과 달리 가치를 빨리 증명하기 위해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게 되고, 자금에 대한 니즈는 계속 증가는 반면 후속 투자가 지연되어 결국은 캐시 부족으로 사업을 접게 되는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발생한다. 그 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벤처기업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캐시 플로우(Cash Flow) 관리인데 높은 밸류에이션이 여기에 독이 되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투자자 입장은 어떨까? 투자자의 목표는 높은 수익률인데, 낮은 가치로 투자해서 높은 가치로 회수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이다. 그렇다면 낮은 가치로 투자하는 것이 반드시 높은 수익률을 보장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벤처투자가 성공하려면 기업과 투자자 간에 오랜 기간 동반자로서 같이 성장하는 파트너십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투자자금을 무기로 기업과 창업가들의 절박함을 이용하여 지나치게 밸류에이션을 낮게 해서 투자하면 좋은 파트너십 관계 형성이 어렵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기대 이하의 평가에 사기가 떨어지고, 설혹 기업이 잘 성장하더라도 투자자에 대한 서운한 감정으로 인해 끝까지 좋은 관계로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다면 벤처기업과 투자자간 최적의 밸류에이션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산정될 수 있을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정답이 없는 예술의 영역으로 치부해 버리기엔 벤처투자에서 밸류에이션은 중요한 요소이기에 벤처투자 업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항상 품고 있는 풀리지 않는 문제다.
그 동안 해외와 국내에서 투자한 경험과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바탕으로 국내 벤처생태계가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고 벤처기업과 투자자 모두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밸류에이션은 어떻게 가능할까를 고민해 보고자 한다. 밸류에이션의 세세한 방법론 보다는 방향성 차원의 고민이다.
자본의 논리가 강한 북미의 경우를 보면, 벤처기업들이 초기부터 외부 투자자의 펀딩을 받아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투자자가 이사회를 통해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과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후속 펀딩도 주도를 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매 투자라운드 마다 기업가치는 기업 또는 창업가의 기대보다는 엑싯 밸류(Exit Value)를 감안한 그 당시의 펀딩 가능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여러 이유에서 이런 매커니즘이 잘 적용되지는 않는 것 같다. 벤처기업과 창업가들의 과도한 부담과 그에 따른 높은 기대감, 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정책적인 투자자금의 확대 등 미국과는 다른 환경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특히 엑싯 시장이 크지 않다는 점도 밸류에이션 측면에서 미국 시장과는 다른 요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처투자에서 밸류에이션은 투자 당시 상황만을 고려해서는 안되며 반드시 엑싯을 염두에 두고 산정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벤처투자는 반드시 엑싯을 전제로 한 투자이기 때문이다. 벤처기업 또는 창업가들은 자기의 기술과 서비스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주위의 환경에 매몰되지 말고 어느 정도로 성장해서 언제 어떻게 얼마의 가치로 엑싯 할 것인지, 그렇게 해서 투자자에게는 몇 배의 수익을 되돌려 줄 것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탄탄한 논리로 투자자를 설득해야 한다. 반대로 투자자들도 기업과 동반자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기대하는 엑싯 밸류와 목표 수익률을 고려해 적정한 투자 가치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면 벤처투자에서 밸류에이션은 투자의 시작이자 투자의 끝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인 것 같다. 단순히 투자 받을 당시에 어느 한쪽이 유리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끝까지 서로가 윈윈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밸류에이션을 고민해야 한다. 물론 엑싯 시장이 충분히 크지 않은 국내 벤처시장에서 엑싯을 염두에 둔 밸류에이션을 얘기하는 게 모순일 수도 있겠지만, 엑싯 시장을 키우는 문제는 별도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로 논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고 보면 국내 벤처투자의 건전한 성장과 활성화를 위해서는 해야 할 것들이 많은 것 같다.
※ 이 글은 서울창업허브(http://seoulstartuphub.com/)와 공동 기획, 진행한 것입니다. 관련 내용 원문은 서울창업허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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