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슬칼럼] 지난 50년간 패스트 팔로워 전략으로 압축 성장에 성공한 우리나라 경제가 최근 성장 동력의 부재와 일자리 창출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분야의 성장 둔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과연 우리 경제는 어디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까? 이를 계기로 우리 경제를 구성하는 한 경제 주체로서 스타트업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에서는 인류의 진보를 이끈 3가지 혁명을 다루는데, 그중 16세기에 시작된 과학혁명을 통해 서양의 국가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서양의 과학혁명이 실증적 관점에서는 지식혁명이 아니라 ‘우리는 모른다’에서 출발한 무지(無知)의 혁명이었고 실용적 관점에서는 단순히 과학적 지식의 축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 기반한 공학과 기술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유럽의 과학혁명은 과학적 지식에 기반한 공학이 다시 과학적 탐구에 활용되어 과학과 공학이 서로 선순환적인 기여를 하면서 획기적으로 기술을 발전시켰고, 유럽 제국은 이러한 신기술을 활용하여 세계를 정복했다. 유럽의 왕가는 신 시장 개척을 위해 콜럼버스와 같은 탐험가에게 벤처투자를 했고, 주식회사라는 조직을 통해 더 많은 자본이 새로운 기술 개발과 시장 창출에 투자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우리 역사에서는 과학-공학-기술의 선순환 구조를 활용한 문제 해결 경험이 극히 제한적이었을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전통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또한 외부에서 들여온 과학, 공학 및 기술에 의존한 패스트 팔로워 성장전략의 시대에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와 계열화 체계 하에서, 글로벌 시장 경쟁에 노출된 대기업 및 일부 중견기업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의 대부분 중소기업은 기술 개발과 축적에 따른 부가가치 창출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력 활용을 통한 점진적 효율 개선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이제 제조업 원가 경쟁에서는 중국 및 동남아 국가에 뒤지고 혁신적인 기술 및 제품 개발 역량은 충분히 갖추지 못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이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몇몇 산업의 선도 대기업은 여전히 성장하면서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는 반면, 경제의 다른 부문의 경쟁력은 제자리에 머물면서 활력을 잃어가는 형국이라 하겠다.
그러면 여기서 얘기하는 과학, 공학 및 기술은 각각 어떤 의미이고, 서로 어떻게 다른 개념인지 우선 정리해 보자.
- Science(과학): 우리가 사는 세계(자연 및 사회)에 대한 보편적 진리 또는 법칙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적인 지식으로, 관찰되는 자연과 사회 현상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 Engineering(공학): 우리 삶의 현장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현재 보다 더 나은 문제 해결솔루션을 설계/제작하여 창조하는 인간의 활동. 과학적 지식을 활용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또는 집단적인 경험 또는 개인의 직관이나 상상력에 기반하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완성되기도 한다. 한편, 학문으로서 공학(工學)이란 이렇게 더 나은 솔루션을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그러한 방법을 찾는 방법론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이다.
- Technology(기술): 반복적으로 재현 가능한 문제 해결의 결과물로 얻어진 도구/기기 및 제작 프로세스와 습득된 지식의총합으로,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 해결에 쓰인 도구와 프로세스에서 구현된 방법론으로서의 지식을 의미한다.
위와 같이 정의한 개념을 산업혁명을 이끈 증기기관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연료를 태우면 열이 발생하고, 그 열로 물을 끓이면 증기가 발생하면서 팽창한다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다. 이 원리를 활용하여 피스톤을 만들고, 피스톤을 활용하여 기계장치를 돌리거나 증기기관차를 만드는 것이 엔지니어링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연료를 써서 물을 가열하고, 어떻게 피스톤을 만들어 펌프에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아는 것이 기술이다.
과거 정해진 정답을 찾아 따라 하면 되었던 패스트 팔로워 전략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우리 스스로 문제를 찾아 해결책을 만들어 가야 하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플랫폼 경쟁의 시대를 맞이했다. 유럽 제국이 16세기과학혁명으로 세계 정복을 가능케 한 힘을 갖추었듯이, 오늘날 우리 경제 전반에 걸친 생산성 혁신과 새로운 성장 동력 창출을 위해 21세기 대한민국 스스로의 과학혁명이 필요한 이유이다.
현재 우리 경제에서 이러한 과학-공학-기술의 선순환 구조에 기반한 문제 해결과 혁신의 노력이 가장 활발하게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분야가 바로 스타트업 섹터다. 스타트업은 고객의 문제를 발굴하여 고객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는 탁월한 솔루션을 제공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성공적인 스타트업은 누구보다도 과학에 기반한 공학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엔지니어링과 기술 개선에 매진하여 제품과 고객 경험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한다. 이를 통해 스타트업은 기존 시장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전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뿐 아니라 기존 사업자와의 경쟁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즉, 탁월한 문제 해결은 스타트업의 생존원리이고, 빠른 성장을 통한 실험과 학습 과정에서 과학에 기반한 공학적 접근과 기술의 적극적인 적용은 스타트업 경쟁력의 원천이다.
따라서, 21세기 대한민국의 과학혁명은 대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스타트업 또한 그 주역이 되어야 한다.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과학-공학-기술의 선순환 구조에 기반한 문제 해결의 경험이 경제 전반에 걸쳐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으로 확산되어 우리 사회 전체의 과학혁명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스타트업 업계 전체의 역사적 사명이다. 스타트업이 개발하고 적용하는 다양한 기술은 실험실이 아니라 시장에서 고객에 의해 검증된다. 이러한 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제품, 서비스 및 비즈니스 모델은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해 고객에게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하도록 선택된다. 이렇게 스타트업 생태계를 통해 개발된 기술, 제품 및 서비스는 기존 중소기업, 중견기업 및 대기업에게 한편으로는 경쟁을,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솔루션을 제공함으로써 경제 전체의 역동성을 배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스타트업 생태계는 우리 경제의 활력소이자, R&D 센터이고 신사업개발 부문이라고 하겠다. 과학-공학-기술의 선순환 구조에 기반한 스타트업의 생존원리와 경쟁력이 우리 경제가 당면한 생산성 혁신과 성장동력 창출의 과제를 해결하는 돌파구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앞으로는 더 많은 대학 연구실의 학위 논문과 연구 논문이 성공적인 스타트업의 기술과 제품으로 진화하도록 인적 및 재무적 자원의 집중적인 투자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엔슬협동조합은 대기업 은퇴 임직원들이 설립한 비영리협동조합으로 조합원의 풍부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스타트업에 필요한 사업화와 시드투자를 제공하고 있으며 투자법인 엔슬파트너스를 설립하여 중기부 등록 액셀러레이터, 도약패키지 지원사업의 주관기관으로 창업기업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다. 엔슬멘토단의 경험과 전문성이 담긴 칼럼은 벤처스퀘어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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