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은 우리나라가 가진 강점 중 하나다.” 석종훈 중소벤처기업부 창업벤처실장이 말했다. 지난 40년 간 경제성장사를 되돌아봤을 때 명과 암은 분명 존재하지만 스타트업과 유기적으로 연결됐을 때 스타트업과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가 사내벤처 육성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혁신성장이 정체된 대기업은 스타트업 기술과 비즈니스모델, 솔루션을 통해 내부에 활력을 불어넣고 스타트업은 대기업이 보유한 마케팅, 시장을 통해 성장하며 일종의 동반성장 생태계를 구축해 나간다는 구상이다.
중기부는 2018년부터 사내 벤처 육성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 사내 벤처 육성 체계와 기반 구조를 뒷받침하고 민간 중심 창업-성장-회수-재투자의 선순환적 혁신 창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취지다. 15일 열린 코리아오픈이노베이션(이하 ‘KOI’) 포럼에서는 ‘개방형 혁신시대, 사내벤처의 역할과 과제’를 주제로 스타트업과 대기업의 오픈이노베이션 방안을 공유했다.
박영훈 GS샵 상무는 ‘효율성의 저주’에 빠진 대기업의 경우 혁신의 수준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경제성장기를 지나며 선진국이 만들어놓은 비즈니스 모델을 따라가는 동안 극단적으로 효율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고 이 점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다.
박 전무는 “잘 짜인 조직, 효율성을 담보하는 프로세스가 이미 충분한 수익을 담보하고 있다면 기업 입장에서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며 “기업 내부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테스트를 거쳐 스케일업하기까지 상당한 오랜 시간이 걸리고 위험부담이 따르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기업 내부 조직 변동도 변수다. 대표이사와 같은 최종 결정권자가 교체되면 내부 혁신 드라이브도 주춤한다. 다시 드라이브가 걸릴 때 즈음 내부 결정권자가 바뀌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결국 기업이 가진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내부에서 발현되지 못한 혁신은 외부에서 수혈된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고 의욕이 넘치며 기업가정신이 충만한 팀에게 투자하는 방식이다. 박 전무는 “일종의 상생 생태계를 만들면서 스타트업의 빠른 성장을 돕고 기업이 겪는 답답함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혁신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김도현 국민대 글로벌 창업벤처대학원 교수는 이처럼 기업 내부에서 별도 사업을 만들어 스타트업을 만들어가는 일을 기업벤처(Corporate Ventureing)로 정의했다. 이미 될 만한 사업을 기존 사업 모델에 붙이는 사업 다각화가 아니라 상당한 위험을 가진 모델을 기업이 만든다는 점에서 기업 다각화와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기존에 하던 일과 달리 꽤 위험이 높은, 그러나 잠재적인 성장도 빠른 모험적인 비즈니스를 사업에 추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 교수는 기업벤처를 세 가지로 분류했다. 조직 내부 인력이 새로운 사업모델로 혁신을 만드는 ICV(internal corporate venture) 내부 자원을 외부 스타트업과 공유, 협업과 투자를 통해 육성하는 ECV(external corporate venture), 기업벤처캐피털(CVC)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ECV는 지에스홈쇼핑, 롯데액셀러레이터, 한화드림플러스, 퓨처플레이 등이 있다. 삼성전자 씨랩, 현대자동차 h-스타트업은 ICV, 네이버 D2SF 등은 CVC로 분류되고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사실상 우리나라 상위 대기업이 20-30 사내 벤처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기업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정부가 이를 뒷받침해주는 모양새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동상이몽에 가깝다는 평이다. 김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업은 혁신 및 신사업 발굴에 집중하지만 정부는 기업 인재 창업 장려를 통해 우수 스타트업을 배출하기 원한다.
기업과 정부는 다른 꿈을 꾸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혁신 드라이브를 거는데 사내벤처 정책이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다. 노현석 현대자동차 H스타트업 팀장은 “수익성을 갖춘 사업모델이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만들기까지 여러 지원이 필요하지만 기업 내부에 요구하는 건 쉽지 않다”며 “대기업 내 사내벤처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여건 상 정부 지원이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노 팀장은 또 “지원과는 별개로 스타트업이라 해도 대기업에 소속돼 있어 스타트업에는 버거운 규제가 적용된다”며 대기업과 같은 잣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내부 혁신에 제동이 걸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오픈이노베이션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혁신을 외부로 확대한다는 점에 지원책이 확대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고영민 신한카드 신사업 팀장은 “핀테크 성장 등 금융분야가 외부에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오픈 이노베이션을 해야하는 상황”이라는데 동의했다. 신한카드 또한 4년 전부터 스타트업 투자와 사내벤처 육성에 힘쓰고 있다.
고 팀장 또한 사내벤처 육성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아직까지 기업 내부 혁신은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다. 고 팀장은 “궁극적으로 (사내벤처를) 왜 해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전했다. 답을 내기 위해서는 사내벤처를 통해 성공례가 나오고 일정부분 성과를 거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짧은 시간 내 성과를 내기란 요원하다. 그 과정에서 역시나 인력 변동이 생기고 또 다시 같은 절차가 반복된다.
아울러 사내벤처를 바라보는 기업 내부 시선도 온도차가 발생한다. 유능한 인재를 놓치기 싫은 건 기업도 마찬가지. 분사 이후 투자를 집행, 지분을 취득한다고 해도 회사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사내벤처를 육성하기 보다 기업 주요 비즈니스 모델에 투입하는 편이 낫다는 시선도 있다는 의견이다. 고 팀장은 “사내벤처 육성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기업이 당위성을 찾기까지는 아직 답이 부족하다”며 “기업이 지속적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지원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종호 키튼플래닛 대표도 “사내벤처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성장통을 겪지만 “ICV, ECV, CVC가 자리잡는 동안 생태계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키튼플래닛은 삼성전자 씨랩 출신으로 1년 간 인큐베이션을 거쳐 스핀오프한 스타트업이다. 삼성벤처스로부터 시리즈 펀딩을 받고 이후 롯데액셀러레이터, 한화 드림플러스를 거치며 ICV, CVC, ECV를 두루 경험했다. 최 대표는 “스핀오프의 역설이라고 할만큼 ICV는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있지만 확실한 건 스타트업과 기업 모두에게 새로운 자극이 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최 대표는 “창업과 지원은 별개의 문제”라며 “창업을 하고자 하는 이는 지원이 없어도 나오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박 전무도 같은 의견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업을 할 사람에게 사내벤처를 장려하는 제도가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박 전무는 또 “대기업 출신은 이미 일반 창업자보다 이점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정부 지원정책이 대기업 출신 인재에 초점에 맞춰 있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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