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이렇게 직접 찾아왔느냐” 한 눈에 봐도 단어와 압존법이 따로 노는 이 문장은 한 게임 속 자막 일부다. 게임 속 대사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오역 참사다. 오역으로 인한 피해는 이 뿐 아니다. 비즈니스 분야패션 분야에서 절단을 뜻하는 CUT은 금융 분야에서 그대로 쓰이기도 한다. CUT은 금융 분야 특성상 손절로 풀이하는 게 맞다.
조은별 바벨탑 대표는 “잘못된 번역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존 번역 시장의 특수성 때문이다. 번역 의뢰를 받은 에이전시가 출혈경쟁으로 번역료를 낮추고 다시 번역가에게 일을 분배하면서 번역요율은 떨어진다. 번역가 입장에서는 급하게 들어온 일을 거절하기 어렵다. 다음 번역 의뢰가 들어올 때를 대비해 일정과 자신의 전문분야와 상관없이 일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저품질 하향 평준화된 번역이 되풀이 되고 번역가와 의뢰인 모두에게 고통 받는 구조가 고착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후려치기, 날림 번역 없는 플랫폼 구축=현직 번역사로 활동하던 조 대표는 그가 느낀 불편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전문 번역 플랫폼 바벨탑을 만들기 시작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번역가와 의뢰인이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한 것. 의뢰인이 홈페이지에서 출발어와 도착어, 프로젝트 유형과 전문 분야을 선택한 후 원문을 올리면 예상 번역 시간과 글자 수가 산출되는 형식이다.
이후 글자당 번역 비용과 구체적인 작업 계획이 공개된다. 가령 24시간 작업이 예상되는 일이라면 달력에 일당 작업 시간을 표시된다. 노동법 사각지대에서 일하는 프리랜서 번역가의 워라벨을 보장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갑작스레 일이 들어오면 밤을 새거나 주말에도 작업을 해야 한다. 실질적인 번역요율은 시간당 계산하면 최저 임금을 웃돈다. 번역사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도 최저임금 이상을 보장받고 기본적인 생활권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번역사는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가장 적합한 번역사를 연결해주는 자동매칭과 선호하는 번역사로 요청하는 선택매칭으로 만날 수 있다. 매칭 시에는 번역 작업 목록과 후기 등 선택에 필요한 정보가 공개된다. 불투명한 연결고리로 이어져있던 번역 시장은 의뢰자와 번역가 모두 투명한 정보공개를 통해 새로운 관계 맺기에 나섰다.
◇번거로운 작업은 끝, 효율성은 최대로=“번역 품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건 소통이다” 조 대표는 “고객사와 번역사가 말을 많이 해야 품질이 좋아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번역사 입장에서 맥락이나 의도를 알면 보다 정확한 번역이 가능하다. 의뢰인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뉘앙스와 의도를 말해줘야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원문과 번역 작업물이 동시에 올라가는 클라우드 기반 대시보드, 실시간 대화창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작업 상황을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양질의 번역본을 얻을 수 있다.
작업 과정에서 겪는 불편도 덜었다. 정석대로라면 원문을 읽고 용어를 조사한 후 1차 번역이 이뤄진다. 번역 후에는 원어민 검수와 윤문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사용하는 업무 도구는 PPT, 워드, 한글 모두 제각각이었다. 번역 작업을 정리하기도 번거로울 뿐 아니라 번역가의 자산이라고 해도 무방한 용어장 관리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조 대표는 “번역가는 문화, 사회, 산업 등 분야를 나누고 이를 다시 세분화해 엑셀파일로 기록한다”고 설명했다. 제대로 된 단어장을 가지고 있어야 오역 위험을 줄일 수 있지만 문제는 번역 작업 시 방대한 자료를 일일이 찾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바벨탑은 SaaS툴에 용어장을 옮겨왔다. 번역가가 기록하거나 사용한 용어 데이터베이스를 작업 시 SaaS툴에서 그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조 대표는 “기업고객이 원하는 고유명사나 전문용어가 프로젝트 원문에 속해 있으면 단어장에서 확인하면 그만“이라며 ”번역가 입장에서 사전을 찾거나 고객사의 톤앤매너를 일일이 검색해볼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제너럴리스트에서 스페셜리스트로, 번역가의 미래 제시할 것=프로젝트 유형, 전문 분야별 번역 데이터는 바벨탑 플랫폼에 고스란히 쌓이고 있다. 강점은 문단별 번역쌍이 모아진다는 것. 데이터는 다음단계 인공지능 번역에 사용될 것이라는 게 조 대표 설명이다. 조 대표는 “현재 상용화된 인공지능 번역이 범용적으로 쓰인다면 다음 단계는 비즈니스 엔터프라이즈급 번역”이라며 “이를 위해 필요한 프로젝트 유형, 전문분야 별 용어와 문체 등 문단별 번역쌍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 분야까지 인공지능이 대체한다면 번역가가 설 자리가 좁아질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조 대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조 대표는 “인공지능은 현재 번역을 위해 해야 하지만 수고스러운 일인 일명 ‘노가다’를 대체할 뿐”이라며 “창의성이나 복합인지능력, 감성이 개입된 번역은 여전히 번역사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기계적으로 해야 했던 용어 검색과 치환은 인공지능에 맡기고 번역사는 고차원적인 일에 집중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면 제너럴리스트 영역에 머물던 번역사도 스페셜리스트로 각을 세울 수 있을 것이란 기대다. “그동안 번역시장은 전문 분야에서 활동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지만 번역사가 번역 본업에만 집중하게 되면 자신만의 특화 분야를 쌓을 여력이 생긴다. 길게 보면 번역에서 나아가 설 자리가 늘어나는 것이다” 예컨대 IT에 특화된 번역사는 번역뿐 아니라 통역, 집필, 조사 연구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다. 해외 기술 트렌드나 정보를 특화 분야 번역사가 빠르고 정확하게 실어 날라 줄 수도 있다. 조 대표는 “바벨탑이 고도화 되면 고숙련 프리랜서가 활동하는 긱이코노미 플랫폼으로도 기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에는 번역업이 사양 산업이라는 고정관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해외의 경우 번역 사업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의 번역 스타트업 인수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미국 대표 번역 회사 트랜스퍼펙트는 트랜스레이트나우, 라이온브릿지는 젠고를 인수했다. 기존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안정적인 매출이 가능했지만 인공지능을 도입해 번역 사업의 외연을 넓히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바벨탑도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번역가의 미래를 재정의한다는 입장이다. 번역은 더 정교하게, 번역가는 더 전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틀을 다진다는 목표다. 2017년 전문번역 서비스 출시 이후 공공기관, 대기업,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시장에 진입한 바벨탑은 이를 바탕으로 전문 번역 데이터를 확보하고 2020년부터는 바벨탑 지능화에 시동을 걸 계획이다. 조 대표는 “특화된 통역사가 양질의 번역 글을 제공하고 이를 토대로 글로벌 비즈니스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포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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