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Metaverse)
1992년 출간된 소설 <스노 크래시> 속 가상 세계의 이름인 ‘메타버스’가 30년이 흐른 지금 IT 분야의 떠오르는 키워드로 쓰일 것이라고 작가 닐 스티븐슨이 예견하지 않았을 지라도, 이 용어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 IT 업계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온갖 소셜 미디어도 그렇고, 최근 뜨는 클럽하우스 조차 메타버스는 흥미를 끄는 주제임은 틀림 없다.
물론 메타버스가 갑작스럽게 대중의 관심을 끌며 이른바 ‘흥’하는 흐름처럼 보이기는 해도 메타버스에 대한 논의는 2000년 대 초반부터 일찌감치 시작된 데다 2000년 대 중반에는 이에 대한 개념을 가진 3D 월드나 3D 웹 서비스를 통해 입증된 적도 있었다. 단지, 반짝 지나는 유행 정도에 그친 반면, 지난 해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라 디지털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확장 현실(eXtended Reality) 기술의 이용 경험이 증가하면서 이에 대한 보편적으로 쓸 수 있는 산업적 정의가 필요했던 테크 기업들을 중심으로 메타버스 논의가 촉발됐다.
하지만 메타버스에 대한 업계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어도, 정작 메타버스가 무엇이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대부분은 혼란스럽다. 혹자는 몇 가지 애플리케이션 사례를 들며 수많은 이용자들이 참여하는 디지털 공간을 메타버스라고 부르기도 하고, 다른 쪽에선 이보다 더 복잡한 환경적 요소를 추가해야 진정한 메타버스라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메타버스가 VR/AR을 아우르는 확장 현실을 위한 디지털 공간을 뜻하는 것도 아님에도, 디지털 공간에 들어간 참여자의 물리적 제약을 약화시키고 이질감 없이 몰입도를 높인 XR 기술로 인해 더 관심을 높인 터라 특정 산업에 대한 방향성으로 읽히기도 한다.
다행이라면 적어도 메타버스에 대한 정의를 해 나가는 데 있어 공론화 과정을 거치며 방향성을 잡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논의 과정을 나온 메타버스에 대한 몇 가지 핵심 요소는 디지털 공간이라는 기존의 특징 외에도 다양한 공간으로 끊임 없이 확장하면서, 참여자의 창의성을 위한 활동과 이에 대한 거래가 이뤄지는 디지털 경제 시스템을 갖추고, 여기에 다른 애플리케이션 또는 공간에 대한 데이터 호환성을 제약 없이 보장하는 것 등이다. 사실 이 요소들은 모두 소설 속 메타버스에 모두 담겨 있는 이야기지만, 이 요건을 모두 충족하는 메타버스는 찾아내기 어렵다.
때문에 이 요건을 모두 충족하진 않더라도 가능성을 가진 공간 애플리케이션이나 서비스를 메타버스로 내세우는 경우가 흔하다. 포트나이트나 로블록스, 마인크래프트, 포켓몬 고, 그 밖에 스페이셜이나 알트스페이스VR 같은 다중 사용자 기반 디지털 공간 서비스를 메타버스라고 부르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지금 메타버스라고 부르는 앱과 서비스는 그 일부일 수는 있어도 메타버스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 즉, 메타버스 안에 다양한 공간 서비스와 앱이 존재할 수 있어도, 세계관을 가진 단일 디지털 공간을 메타버스라는 우리 세상을 초월한 세계라고 말하긴 어렵다는 이야기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해야만 메타버스라는 주장도 디지털 공간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판단이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공간형 애플리케이션은 디지털로 구축된 개별적 문화 공간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면 메타버스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앞서 소설 속 메타버스의 모습과 논의된 요소를 결합해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각각 다른 세계관을 가진 낱개의 디지털 공간을 연결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기술적 호환 시스템을 제공하는 영속적 차세대 컴퓨팅 포털’. 즉,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기술을 제공하는 플랫폼의 역할과 더불어 이용자가 쉽게 쓸 수 있는 서비스로써 가치까지 포함하는 아주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흩어진 여러 공간을 이어 붙이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의 형태를 갖춘 메타버스로 완성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과거 PC나 모바일처럼 확실히 시장을 주도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가진 테크 기업의 플랫폼을 선택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면 쉽겠지만, 지금은 행성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믿고 모험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스타트업에게 메타버스는 어려울 수도 있다. 섣불리 불확실한 모험에 뛰어들기엔 위험 요소가 훨씬 많다. 무엇보다 이미 보편화된 플랫폼 위에서 평면적인 서비스를 만들던 것과 완전히 다른 디지털 공간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방식을 새롭게 다듬어야 해서다. 단순히 3D로 만든 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디지털 공간을 기반으로 한 이용자 경험은 우리의 일상에 훨씬 직관적이고 몰입적이므로 더 많은 시스템 자원 및 비용을 소비하므로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목적지를 찾아 떠나는 모험가적인 스타트업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적어도 이들에겐 앞서 그런 도전을 했고 지금까지 잘 버틴 일부는 이미 메타버스 시대의 마중물이 되어 수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서비스들이 본보기일 것이다. 게임이거나, 3D 소셜이거나, 체력 단련 서비스거나, 미디어 서비스가 대부분이라 공간의 경험이 중복되지만, 이러한 디지털 공간을 찾아 다니는 이용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쯤에서 메타버스 세계를 향한 모험의 방향은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메타버스라는 거대 생태계에 도전할 수도 있고, 메타버스에 어울리는 세계관을 가진 독자적 공간을 만들 수도 있으며, 메타버스에서 요구하는 데이터를 손쉽게 쓸 수 있는 기술적, 시스템 자원을 공급하거나 메타버스 참여자의 감각을 확장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 수도 있다. 또한 메타버스 세계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고 싶은 기업이나 공공 기관을 돕는 작업도 할 수 있다. 꼭 유명한 게임을 따라 만들 필요도 없고, 아주 색다르게 창의적인 공간을 시도하지 않아도 메타버스를 성장할 동력을 가진 거대 산업으로 본다면 곳곳에 도전할 만한 포인트는 널려 있다.
메타버스 산업에 참여할 스타트업이 나아갈 방향을 콕 짚기는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어떤 공간을 만들더라도 그 공간은 우리의 현실을 초월하는 세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간뿐 아니라 당연히 시간도 포함되고, 우리의 모습도 다를 수 있다. 우리 세상에 갇힌 인식의 한계를 깨는 것. 아마도 메타버스 스타트업의 출발점은 이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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