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고문은 아산 기업가정신 리뷰(Asan Entrepreneurship Review, AER) ‘존재하지 않는 시장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방법 – 에누마,’ 저자: 박윤중 사례의 일부 내용을 발췌 및 재구성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당 사례는 AER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고자의 주장이나 의견은 벤처스퀘어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소셜 벤처 에누마는 게임 디자이너 출신인 이수인 대표가 2012년 창업한 회사다. 2014년, 학습 장애를 겪는 아이들에게 게임을 통해 수학학습을 돕는 ‘토도수학’을 출시하였고 1년 만에 400만회를 상회하는 다운로드 수를 기록했다. 이후 2015년 개발도상국가 아동의 기초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글로벌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경연대회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에 참여해 이 대회의 공동우승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를 통해 500만 달러에 이르는 상금을 탔고 1000만 달러를 넘는 누적 투자액을 유치했다.
토도수학은 현재 누적 다운로드 수 800만을 넘어섰다. 이러한 대대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에누마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투자유치 실패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녹아 있다.
◆ 초기 투자유치의 어려움 – “장애라는 말은 좀 뺄 수 없나요?”
이수인 대표가 에누마를 창업하기 전 2010년으로 시간을 잠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수인 대표는 당시 몸담고 있던 게임회사의 사회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아이패드를 활용해 장애 영유아들을 위한 학습 게임을 개발하는 ‘인지니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장애아동의 엄마로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임 개발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 자신의 아이에게 도움이 되면서 재미있기도 한 게임을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 에누마는 태생부터 소셜벤처로서 장애아들을 위한 게임을 만들겠다는 미션을 설정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2012년 에누마의 첫 서비스인 토도수학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하여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참여한 한 컨퍼런스에서 장애아동들을 위한 특수한 콘텐츠의 필요성에 초점을 맞춘 피치덱(투자 및 홍보 목적의 소개자료)으로 발표를 진행하였다. 발표를 마친 이수인 대표에게 심사위원은 “제품은 정말 좋은데… 장애라는 말은 좀 뺄 수 없나요? 장애아들의 ‘특수한 필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 같으면 안 살 것 같아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장애아동들을 위한 서비스는 시장이 좁을 수밖에 없고 규모 있는 성장을 이룩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이후 수많은 피칭과 프레젠테이션 경험을 통해 투자자들이 게임회사에서 일해 온 이수인 대표 부부의 경력과 인지니 프로젝트로 축적된 경험에 기반한 교육의 게이미피케이션(게임화)에는 매우 높은 점수를 주는 반면, 학습장애를 보유한 아이들에게 타겟팅 된 좁은 시장전략에는 상당히 부정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 다시 찾아온 투자유치의 굴레
결과적으로 에누마는 2015년 일반(영리)투자자로부터 400만 달러 규모의 첫 시리즈 A 투자를 유치하여 초기 투자유치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 장애아동을 위한 서비스를 영업하기보단 보다 넓은 시장, 즉,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포괄적으로 돕기 위해 개발된 학습 콘텐츠로 토도수학을 세일즈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초기에 설정했던 사회적 미션을 추구하기보다는 영리투자자들에게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현실과 상당부분 타협하였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비록 바라던 성장을 이루었지만 초기 개발의도와는 다르게 토도수학이 충분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에게 수학개념의 기초적인 선행학습 도구로 사용되는 현상을 직면하게 되면서 이수인 대표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에누마의 미션과 가치에 더 부합하는 신제품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2016년 일론 머스크가 후원하는 ‘글로벌 러닝 엑스프라이즈’ 참가를 결정하게 된다. 엑스프라이즈의 지향점이 에누마의 사회적 미션과 잘 맞으면서 토도수학을 개발하면서 쌓은 핵심역량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엑스프라이즈는 5년의 적지 않은 기간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이를 버틸 자금이 필요했다. 결국 에누마는 엑스프라이즈에서 파이널리스트에 오를 정도로 선전하였지만 예상했던 자금 부족은 피할 수 없었다. 우승자 발표가 15개월이 남은 시점에서 대회를 마치기도 전에 운영자금이 마른 이수인 대표는 다시 투자유치를 위해 피치덱을 준비해야만 했다.
엑스프라이즈에 참여하게 되면서 에누마는 더 이상 영리투자자들에게 투자를 유치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일반투자자들에게 비영리 경연대회 참가는 긍정적으로 평가받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엑스프라이즈에서 에누마의 성과에 관심을 보인 투자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2010년대부터 한국에도 조금씩 자리잡기 시작한 옐로우독, D3쥬빌레, 소풍과 같은 소셜 임팩트 펀드들이 대표적이다. 2017년 이수인대표는 이들 앞에서 다시한번 투자유치에 도전했다.
이번 피치덱은 2015년 피치덱과 차이점이 존재하였다. 피치덱에 일반적으로 포함되는 사업모델(BM), 타겟시장, 시장규모에 대한 내용이 빠지고 이수인대표 부부와 아이의 사진, 엑스프라이즈의 대상이 되는 탄자니아 아이들의 사진, 그리고 아직도 제대로 교육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경제적 가치보단 사회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발표였다.
조직이론의 대가인 March 교수는 기업가의 성공경험이 클수록, 또 경험이 많이 축적될수록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기존의 패턴을 유지하려는 관성이 높아져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을 ‘성공의 함정’이라고 설명한다. 2015년 영리투자자로부터 400만 달러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경험을 보유한 이수인 대표는 성공경험에서 발생하는 관성을 이겨내고 ‘성공의 함정’을 성공적으로 돌파했다. 청중을 고려한 피치덱을 활용한 이수인 대표의 당시 발표는 결국 2018년 옐로우독, HGI 등 국내의 임팩트 펀드로부터 성공적으로 400만 달러에 달하는 두번째 시리즈A 투자유치로 이어졌다.
이 투자금을 바탕으로 2019년 에누마는 무사히 킷킷스쿨 개발을 완료할 수 있었고 대회 공동우승자로써 머스크의 호명을 받았다. 에누마의 누적 투자액은 1,000만 달러를 뛰어 넘었고, 토도수학의 누적 다운로드도 800만을 넘어섰다. 또한, 킷킷스쿨은 탄자니아와 케냐를 거쳐, 우간다의 난민캠프에서도 사용되는 글로벌 기초학습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었다.
피칭덱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덕목 – 공감가는 스토리텔링
“스토리가 없는 회사는 대개 전략이 없는 회사다.”
– 벤 호로위츠 (앤드리슨 호로위츠 공동 창업자)
기업가가 투자자를 비롯한 청중 앞에서 직접 BM을 설명하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 역시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재미와 흥미로움이 스토리텔링의 전부는 아니다. 기업가가 제안하는 BM은 혁신성과 차별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투자자가 느끼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시장의 관례화 된 관행들을 따라하는 어찌 보면 상충되는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특히 초기단계 스타트업의 BM은 더더군다나 그 완성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기업가적 정체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narrative)가 더욱 중요하다. 이것이 스토리텔링의 목적이며, 시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그에 대한 기업가의 문제해결 그리고 결과로 이어지는 전반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프레임을 제공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를 통해 투자자는 투자결정에 타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다. Clemson University의 경영학과 교수 Navis와 Boston College의 교수 Glynn은 스토리텔링을 직관적 의미 전달, 일관적인 스토리 구성, 그리고 스토리에 대한 공감의 세가지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이중 스토리에 대한 공감 부분이 피치덱의 성공여부를 가를 수 있는 핵심이다. 같은 성장단계에 있는 기업의 피치덱이라도, 투자자의 성향(영리/소셜 임팩트)에 따라 스토리텔링의 순서와 어휘, 강조점이 달라지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야기가 청중의 마음을 움직여 투자자의 긍정적인 반향(resonance)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2015년 일반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피치덱과 2017년 임팩트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피치덱은 성공적인 스토리텔링 전략의 핵심요소들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어느 부분에 방점을 찍는가?’라는 관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2015년 시리즈A 투자를 받기 전, 영리투자자를 타겟으로 만든 피치덱은 토도수학이 갖는 경쟁우위, 타겟 시장의 크기와 BM의 실현 가능성이 에누마의 소셜 미션과 이수인 대표의 개인적 창업동기보다 중요하게 다뤄졌다.
이러한 접근은 기존 투자자들에게 친숙한 필요와 욕구에 보다 직관적으로 호소하여 공감을 샀다. 여기서 이수인 대표의 개인적인 창업동기는 전체 피치덱의 배경과 사업의 명분을 제공하는 기반으로서, 맞춤형 학습 콘텐츠의 전문성과 필요를 담보함으로써 핵심적인 내용을 받혀주는데 그쳤을 뿐이다. 이에 반해, 2017년 임팩트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피치덱은 이수인 대표의 개인적인 스토리를 사회적 필요의 맥락과 엮어 함께 풀어냄으로써 의미가 확장되고 투자자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핵심 전략 요인이 되었다. 2017년 피치덱은 소셜 임팩트에 정렬된, 사회문제-솔루션-솔루션의 가치로 이어지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채택했다. 2015년과 2017년 피치덱의 비교를 통해, 투자자의 성향(영리/소셜 임팩트)에 정렬된 피칭전략 및 전달의 변화가 투자유치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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