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성의 역설을 극복하는 딥테크 스타트업의 자세 – H2

본 기고문은 아산 기업가정신 리뷰(Asan Entrepreneurship Review, AER) ‘에너지의 흐름을 잡는 기업: 플로우 배터리의 선두주자 – 에이치투’ 사례의 일부 내용을 발췌 및 재구성한 부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해당 사례는 AER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기고자의 주장이나 의견은 벤처스퀘어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자: AER지식연구소 조민수 선임연구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은 특정 재화의 수요와 공급의 시차로 발생하는 시장의 불균형을 ‘샤워실의 바보(A fool in the shower room)’ 딜레마라고 명명하였다. 샤워실에서 찬 물에 놀라 뜨거운 물을 세게 틀고, 너무 뜨거워져 다시 찬물을 세게 트는 과정을 반복하며 적절한 온도를 찾지 못하고 물과 시간만 낭비하는 바보를 의미한다. 언뜻 한심해 보이지만 이런 비효율은 흔히 발생하는데 최근 급격한 재생에너지 발전소 확대가 이 사례에 해당한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위해 전세계적으로 태양광, 풍력 등 다양한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빠르게 늘려왔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2030년까지 CFI(Carbon Free Island) 달성을 추진하고 있는 제주도는 탄소중립 비전의 달성을 위해 빠르게 태양광 및 풍력 발전설비와 같은 신·재생에너지 발전용량을 빠르게 확충하여 왔다. 하지만 발전량 확대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재생에너지 발전과 함께 반드시 함께 고려하여야 할 한가지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였다. 바로 불규칙하고 간헐적인 재생에너지 발전의 특성이다. 화력발전과 같은 전통적인 발전 방식들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 발전하는 것이 가능하다. 전력 수요가 증가하면 맞추어 발전량을 늘리고, 감소하면 발전량을 줄이는 형태이다. 하지만 재생에너지의 경우는 발전할 수 있을 때와 그러지 못할 때가 불규칙적이므로 필요한 때에만 발전하는 것이 어려워 재생에너지의 발전 용량이 늘어남에 따라 에너지의 공급과 수요의 시차로 인한 비효율성이 증대되는 것이다(Exhibit 1).

Exhibit 1. 신재생에너지 출력제한과 천연가스 발전을 통한 전력 피크 대응

(출처: AER – 에너지의 흐름을 잡는 기업: 플로우 배터리의 선두주자 – 에이치투)

결국 문제가 터졌다. 23년 상반기에만 51회 출력제한(발전량이 많아지는 시간대에 송·배전망이 이를 다 수용하지 못해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 발생하며 전력운용 효율성에 문제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 발전사업자들에게 상당한 재산상 피해를 일으켰다. 탄소중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신·재생에너지 발전량의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결국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대용량 ESS(Energy Storage System, 에너지 저장 시스템)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비정기적으로 발전한 전력을 저장해둘 충분한 저장소를 확보해 전력운용의 안정성을 높여는 것이다. 정부도 이를 인지하고 올해부터 적극적으로 대용량 ESS시장을 확대해갈 예정이다. 이 시점에 메가와트시(MWh) 이상 유틸리티급 흐름전지 생산을 통해 대용량 ESS 시장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 있는 국내 기업은 베터리 딥테크 스타트업 H2가 유일하다.

Exhibit 2. 전력산업구조와 ESS의 역할 및 글로벌 시장 규모(2023년 기준)

(출처: AER – 에너지의 흐름을 잡는 기업: 플로우 배터리의 선두주자 – 에이치투)

2010년, H2를 설립한 한신 대표는 조선 관련 중공업 회사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대용량 장주기 ESS(4~12시간 이상 연속적으로 출력이 가능한 에너지 저장 장치) 시장에 대한 필요성을 남들보다 빠르게 인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낮은 비용으로 긴 시간동안 안정적으로 전력을 저장하고 방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배터리계의 주류로 자리잡아 우리에게 친숙한 리튬이온 배터리는 장주기 ESS시장에 적절한 대안이 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희소한 재료의 특성상 매우 비싸 대용량으로 운용하기 쉽지 않고 출력과 저장용량을 개별적으로 조정하기도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화재 및 폭발에도 취약하여 대규모 저장소를 건설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이에 한신 대표와 H2가 주목한 기술이 바나듐 흐름전지(Vanadium Flow Battery, VFB)이다. VFB는 공간만 충분하다면 전기의 ‘저장 용량’과 ‘전력 출력’을 비교적 싼 가격에 긴 사용주기동안 손쉽게 조절할 수 있고 불연성 액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화재나 폭발의 위험에서 자유로워 이론적으로는 장주기 ESS로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기술적 특성을 갖고 있다.

(Exhibit 3). 한신 대표는 2010년 당시 장주기 ESS 시장의 높은 잠재성과 VFB의 적합성을 믿고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KAIST출신 기계공학과 연구실 동료와 의기투합하여 VFB 개발에 착수했다.

Exhibit 3. VFB vs. Li Battery: 균등화발전비용 및 연간 감모율 비교

(출처: AER – 에너지의 흐름을 잡는 기업: 플로우 배터리의 선두주자 – 에이치투)

이렇게 시작한 ‘바나듐 래독스 흐름전지,’ 그 이름조차 생소한 기술을 상업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으로 개발해내는 것은 온갖 난관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기술적인 어려움보다 한신 대표를 힘들게 했던 것은 닿을 듯 닿지 않는 신기루처럼 열리지 않던 시장이었다.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2015년이면 이미 형성이 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재생에너지 시장은 도무지 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업화와 시장 형성에 대한 장벽은 여전히 높았다. 기술적 참신함과 우수성을 강조해 보았지만, 시장이 열리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자와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딥테크 스타트업이란 사업화가 어려운 최첨단기술(cutting-edge technologies)을 기반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시장에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타트업을 의미한다. 기존의 기술 패러다임과 시장의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파괴력이 있지만 명확히 정의된 시장이 없는 상태에서 높은 개발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에 딥테크 기술의 개발에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투자가 중요하다. 기술적 측면에서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외부자가 그 내용이나 사업화 단계에 대해 정보를 판별하기 매우 어려워진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커다란 정보격차(information asymmetry)에 직면하게 되고, 대다수의 투자자에게 정보 접근 비용을 증가시킨다. 정보에 대한 접근제한은 결국 기술 혹은 지식에 대한 불확실성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보의 부족은 다시 시장의 관심도 하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딥테크 스타트업은 충분한 투자를 유치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 순간 딥테크 스타트업은 전략 선택에서 역설에 직면한다. 고유한 전략을 선택하면 미래 수익의 기대가치를 극대화하지만, 시장에 높은 정보 비용을 부과하여 가치 할인을 초래한다. 투명하지만 일반적인 전략을 선택하면 정보 비대칭 비용 해소의 문제가 줄어들지만, 차별성에서 타협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딥테크 기업들은 종종 고유성으로 인한 가치 프리미엄과 정보비용 증가로 인한 가치 디스카운트라는 상충된 현상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를 고유성의 역설(uniqueness paradox)이라고 한다(Exhibit 4).

Exhibit 4. 고유성의 역설과 초기 H2의 기업가치 Mapping

(출처: AER – 에너지의 흐름을 잡는 기업: 플로우 배터리의 선두주자 – 에이치투)

Exhibit 4에서 볼 수 있듯, 기업이 제시하는 전략조합(기술+시장) 고유성의 정도에 따라 다음의 3가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 전략조합의 고유성이 과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결국 기업이 평가절하되는 경우 (포인트 A)
  • 전략조합의 고유성이 적절해 시장과 투자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경우 (포인트 B)
  • 전략조합이 투명하나 고유성이 낮아 시장과 투자자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는 경우 (포인트 C)

VFB의 경우 비록 기술적으로 리튬 배터리보다 안정성, 친환경성, 경제성 측면에서 우수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었고 실제로 한신 대표가 만났던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H2의 기술력에 감탄하며 장주기 ESS 중요성에 대해서도 공감을 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한신 대표와 H2 경영진을 지속적으로 괴롭힌 것은 국가가 열어주어야 하는 ‘실질’시장에 대한 기대감의 부재였다. H2가 이러한 어려움을 겪은 것은 근본적으로 ESS의 시장 자체가 국가 차원의 에너지 정책 전환과 재생에너지에 대한 국가적/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선행되어야 형성될 수 있는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H2는 긴 시간동안 포인트 A에 해당하는 지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MBA 수업에서 배웠던 ‘죽음의 계곡’이라는 표현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초기에 받은 투자금은 이미 고갈되어 가는데, 개발 일정은 지연되고 4~5년이면 성숙할 것만 같았던 시장은 아예 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죽음의 계곡이라도 제발 존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 한신 H2 대표이사

비록 최근에 와서 장주기 ESS시장이 각광받기 시작하였지만 그간 H2는 어떻게 그 깊은 죽음의 계곡을 생존했을까? 한신 대표는 그 비결을 투자유치의 전략적 방향성에서 찾았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시장의 도래를 기다리며 기술을 개발하기위해 그는 ‘시간과 안정성’이 투자를 유치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하였다. 대부분의 개인 투자자와 기관 투자자 모두 투자의 회수 시기에 큰 중점을 둔다. 정부가 인증한 탄탄한 시장과 뛰어난 기술 능력이 있더라도, 투자회수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투자자는 주저하게 된다. 더욱이 투자자들은 시장이 마침내 활성화됐을 때 그들의 인내를 안정된 수익으로 보상받길 바란다.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으로 한신 대표와 경영 팀은 투자유치를 위한 네 가지 핵심 원칙을 마련했다(Exhibit 5).

Exhibit 5. H2 한신 대표의 투자유치 네 가지 원칙

(출처: AER – 에너지의 흐름을 잡는 기업: 플로우 배터리의 선두주자 – 에이치투)

H2는 이러한 원칙들을 바탕으로 만기가 없는 산업은행과 10년짜리 신규 펀드를 조성한 KB인베스트먼트로부터 투자를 유치하여 기술적 진보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시장에서 트랙 레코드를 만들어 나가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시장이 없는 상황에서도 트랙 레코드 확보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투자자 및 미래 고객들에게 H2가 가진 잠재력을 보여주는 신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쌓여가는 필드 테스트와 데모 설치를 통해 한신 대표는 H2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시장이 열리는 순간 선두주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었다. 회사를 설립한 지 무려 10년이 지난 2020년, 마침내 정부가 탄소중립을 선언하며 시장이 열렸다. 2020년 이후 H2는 600억에 이르는 투자를 성공적으로 유치하였고 이를 활용해 충남 계룡시에 연간 330MWh 규모의 국내 첫 VFB 전용 생산공장을 준공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초도 물량은 미국 최대 규모인 20MWh의 흐름전지 ESS 프로젝트에 수출될 예정이며 처음 언급한 제주도의 재생에너지 출력제한 문제 해결을 위한 장주기 ESS 설치사업에도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
언제 개화할지 불확실한 시장을 기다리며 기술을 개발하고 트랙레코드를 쌓아가 마침내 기회를 쟁취한 H2의 사례는 배경은 다르지만 가파른 물가상승과 이에 따른 금리상승 및 긴축재정으로 투자유치의 빙하기를 맞이한 많은 창업자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창업가들은 투자를 유치할 때 흔히들 본인이 보유한 지분의 희석을 가장 경계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어려운 시기에는 그에 걸맞은 투자유치 전략이 필요하다. 지분의 희석을 경계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H2와 한신 대표가 취했던 전략처럼 혹한의 시기를 나기위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요소는 ‘시간과 안정성’이 아닐까?

 


  • 관련 칼럼 더 보기
%d blogger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