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전세계 영업의 활성화를 위하여 7대 거점지역에 대해 순차적으로 현지 지사를 설립하며, 경험 없이 좌충우돌한 얘기를 후학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정리해 본다.러시아서 3000만불 계약 무산돼 담배도 끊어
모스크바 잠입해 성사됐으나 옐친 등장으로 물거품
中시장은 판매 쉽지만 수금 어려운 곳이라 고전
1997년 美·日·유럽에 BRICs 포함 7대 거점 완성
1990년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의하여 대 러시아 원조 협상이 진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폴란드에서 2박3일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잠입했다. 과연 기회는 있었다. 옛 소련의 붕괴에 따른 혼란이 극심해 사회주의 종주국의 한 달 월급으로 불과 양담배 한 갑을 살 수 있는 시절이었다.
여하튼 러시아의 사회분야 부총리를 한국의 의료산업계 방문으로 초청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의료기기 3,000만 불이 대 러시아 경협에 포함되는 쾌거를 올리게 됐다. 그러나 91년 친위쿠데타 이후 정권을 장악한 옐친이 과거의 협상 품목은 무시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발표를 해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다. (이 충격으로 필자는 하루 세 갑 피던 담배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이때 맺은 관계로 92년 러시아의 국립 의료기연구소와 최초의 해외 합작사인 Ultramed를 설립하게 된다. 러시아 사업은 꾸준히 지속돼 메디슨의 주요 영업 거점이 됐다.
역시 92년 미국에 MAI, 유럽에 M2유럽이라는 현지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선진국 진입에 필요한 품질 규격을 획득하고 영업 지원을 위한 밀착 서비스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의 MAI는 메디슨에게 너무나 많은 실패 비용을 치르게 했다. 처음 생각은 단순했다. 미국은 50개 주가 있으니 한 주에 1대만 팔아도 월 50대다. 그러면 현지 운영이 가능하다. 순진한 꿈은 첫해 영업을 하고는 접었다. 수많은 전세계 회사들이 미국에 도전해 결국은 투자금만 날리고 물러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미국은 틈새시장을 찾아 정확한 마케팅을 하는 것이 핵심이고 엄청난 사후 관리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실이 1,000만 불을 넘고 있었다. 현지 사장인 마크는 그때마다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시도했다. 그러나 3차원 초음파가 진입하기 전까지 미국은 돈 먹는 하마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3차원 초음파 이후 미국은 권태욱 지사장의 분전으로 메디슨의 핵심 수익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미국은 정말 어려운 시장이다.
유럽은 그나마 미국보다 먼저 자리잡기 시작했다. 유럽 시장은 미국과 달리 최고가 제품보다는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제품이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의료체계의 차이가 초래한 결과로 보인다. 독일 라인강변의 마인즈에 위치한 유럽지사는 비교적 순조롭게 자리잡아 이후 크레츠 인수로 날개를 달게 된다. 특히 남부 유럽이 한국인의 성향과 잘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세계적으로 게르만보다는 라틴 지역에서 메디슨은 좋은 실적을 올리는 경향을 보이는 게 우연은 아닐 것이라 여긴다.
92년 한국은 중국과 수교를 하게 된다. 당연히 기회를 찾아 중국에 입성한다. 당시 상하이는 지금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도로는 엉망이고 차도 없고 야간 조명도 없고, 심지어 술집도 없고…. 그래도 러시아의 경험을 바탕으로 93년 9월 상하이 의료기연구소인 SMEIF와 상하이메디슨이라는 제조 합작사를 설립하게 된다. 생산품의 중국 영업을 시작하고 너무나 흥분했다. 영업이 날개를 단 것이다. 너무 잘 팔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문제가 드러났다. 중국에서 판매는 쉽고 수금이 어렵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고석빈 이두현 조재옥으로 이어지는 메디슨 파견 총경리는 중국의 이해하기 어려운 영업 여건하에서도 상하이메디슨을 중국 10위권의 의료기 회사로 성장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상하이메디슨의 다음 전략은 전국 영업과 서비스망을 구축해 한국 의료산업 진출의 플랫폼을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2002년 메디슨의 법정 관리로 이 전략이 실행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운 점이다. 이후 한국의 의료기 회사들이 개별 진입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모두가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 사업은 플랫폼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94년 메디슨의 오랜 숙제였던 일본 자회사 메디슨재팬을 설립하게 된다. 초대 지사장을 맡은 문정익 사장은 당시 게이요대의 철학 박사과정으로 통역을 하다가 끌려 들어왔다. 창립식 때 많은 재일동포들이 눈물을 글썽였다. 문 사장은 일본 전국을 몸으로 부딪혀 갔다.
그러나 일본은 도저히 시장경제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너무나 많았다. 경쟁사의 영업사원 영입을 위하여 두 배의 급여를 제시해도 통하지 않는다. 영업의 이익보다 오랜 관계를 중요시한다. 한마디로 외부세력의 진입은 원천 봉쇄되고 있었다. 앞서 설명대로 이러한 장벽을 돌파한 것이 3차원 초음파 혁명이었다. 이후 일본은 너무나 쉽고 허망하게 돌파되었다.
95년 남미의 핵심 브라질에 메디슨브라질이 설립된다. 라틴 국가와 메디슨은 궁합이 맞는다는 말을 증명하듯, 브라질은 박준형 조재옥 지사장 시절 외환위기의 어려움을 극복한 후 현지화를 통해 지금도 메디슨이 시장 점유율 선두를 지키고 있는 국가이다. 브라질은 우리에게 기회의 나라이나 문제는 브라질 출장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하루를 꼬박 비행기를 타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메디슨 맨들이 극복하면서 이룩한 성과인 것이다.
메디슨인디아가 설립돼 미국 유럽 일본의 3대 축에 브릭스(BRICS) 4개국이 더해진 7대 거점이 완성된 것은 메디슨 상장 이후인 97년이다. 이후 메디슨 사업은 7대 거점의 현지 자회사와 70개국의 대리점의 이원체제로 운영된다.
세계화를 꿈꾸는 기업들이 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바로 세계화로 가는 길이다. 전세계 영업망을 바탕으로 기술의 혁신이 가속화한다. 전세계 서비스 망을 바탕으로 고객의 문제가 파악된다. 전세계를 연결하는 시장과 기술의 연결 망이 바로 벤처 기업의 궁극적인 핵심 역량이 될 것이다. 그 연결 망의 중요한 허브가 바로 메디슨이 많은 실패를 통하여 도전했던 7대 거점인 것이다.
글 : 이민화